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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난다

카테고리 없음 2021. 6. 2. 20:10

일1ㅗㄴ인이 나보고 일본인짓 하지말래
안되는거 안된다고 햤더니
국적만 한국이고 너무 일본인짓 하지말라구
짜증나
니네도 나한테 한국인처럼 대하든가 ㅗ
-
친구한명 결혼했다.
요즘 연락 안하고 있었다가 소셜미디어 보고 알았다.
되게 기분이 묘하다.
코로나 때문에 결혼식은 안하고 혼인신고만 한거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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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 일왕이자 A급 전범이 89년 1월 사망했다.
당시 미국에선 조지 부시(아빠) 대통령
중국에선 젠지첸 외교부장(장관)


한국에선 강영훈 총리를 필두로 조문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으며 노태우 전대통령은 조전을 보냈다.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는 한국에 있는 일본대사관에 마련된 빈소에 조문했다.


김재순 당시 국회의장과 강영훈 당시 국무총리도 조문했다(강총리는 일본대사관조문+일본 현지조문).


한국인 200명이 조문했으나 일본대사관은 명단을 밝히지 않았다. (기사)


일본 정계와의 인연
김대중은 1971년 5월 24일 14톤트럭 충돌사고로 양팔 정맥과 관절 부상을 당했다. 암살시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껴 72년 10월 11일 일본에서 치료를 받다가  10월 17일 박정희의 비상계엄령과 10월유신선포에 일본으로 망명을 결심한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얘기고 사실 일본은 지금도 난민을 안받아주는 나라가 일본이다. 1965년 국교정상화가 됐다곤 하나 비자받기도 어려운 시절에 일본이 망명을 받아준다? 매우 이례적인일이다. 비자 받기에도 보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무려 당시 일본 외무상이었다. 즉 외무부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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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中拉致事件(青木 徹郎)2003年5月
身元保証人は外相?
北朝鮮による日本人拉致事件が新聞・テレビで大きなニュースとなったが、拉致事件といえば、いまから30年前、韓国の公安当局が、当時、韓国の反政府・民主化運動のリーダー格だった金大中前大統領を日本国内から連れ去った事件と、この事件に関連して、記事には書けなかった1つの、“事実?”を思い起こした。

金大中事件は、韓国の公権力により、国家の主権が侵害されるという、日本にとって極めて重大で深刻な問題であった。しかし、日本の捜査当局が、拉致事件に在日韓国大使館の一等書記官が関与していたことを突き止めたが、日韓両国政府は、事件発生後から3ヵ月後、日韓首脳会談によって、事件の真相解明を棚上げにして政治的決着を図った。

当時のことなので、いつごろのことか、記憶はさだかではないが、この事件に関連して、“重大な事実?”を知った。

日本滞在中の金大中の身元保証人に、当時の大平外相がなっていたという話を、懇意にしていた警察庁幹部から聞かされた。もし、“事実”だとすれば、韓国における反政府運動の首謀者の身元保証人を、こともあろうに日本の外務省首脳が引き受けていたことになる。

この“事実?”が表に出れば、金大中事件の真相解明はもとより、日韓関係そのものにも、重大な影響を及ぼすものと思った。そのため、自分なりに判断して、この“事実?”を報道するのを断念した。心のうちに秘め、ほとぼりがさめたら関係者に確認することにした。

事件前の韓国の政治情勢はどうだったろう。61年5月将校を率いてクーデターに成功した朴正熙は、62年3月に大統領権限代行になり、63年10月の選挙で、尹候補を小差で破り、第5代大統領になっていた。長期化する軍事政権に対する反政府・民主化運動が、国民の間で高まっていた。

こうした中で、71年に大統領選挙が行われ、朴大統領と、野党「新民党」のスポークスマンとして金泳三らと共に活躍していた金大中の2人が争った。選挙の結果は、634万票対540万票と約90数万票差で、現職の朴大統領が勝利をおさめた。しかし、金大中候補の大統領選の善戦は、反政府・民主化運動を勢いづかせた。

その直後、金大中が交通事故で重傷を負う事故が起こった。朴大統領の強力な政敵となった金大中を抹殺するため、KCIA(韓国中央情報部)が企てたという“陰謀説”もあった。金大中は、このケガの後遺症の治療や海外の同胞たちの支援を受けるため、たびたび米国や日本を訪れ、反政府・民主化運動を続けていた。

90万という票差に危機感をつのらせた朴政権は、政敵・金大中の反政府運動を抑圧するため、彼の海外滞在中の72年10月に「非常戒厳令」を発令した。このため金大中は、国外へ亡命したも同然となり、とても韓国に戻れる状況ではなくなった。

この翌年、金大中事件が起こった。当時の報道をもとに事件の概要をまとめた。
김대중 납치사건(아오키 테츠로 기자) 2003년 5월
신원 보증인은 외무상?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건이 신문·텔레비전에서 큰 뉴스가 되었지만, 납치 사건이라고 하면, 지금부터 30년전, 한국의 공안 당국이, 당시, 한국의 반정부·민주화 운동의 리더격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일본 국내에서 떠난 사건과 이 사건과 관련해 기사에는 쓸 수 없었던 하나의 ‘사실?’을 상기시켰다.

김대중 사건은 한국의 공권력에 의해 국가의 주권이 침해된다는 일본에 있어서 매우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일본 수사당국이 납치사건에 재일한국대사관의 일등서기관이 관여했던 것을 밝혀냈지만, 한일 양국 정부는 사건 발생 후 3개월 후 한일 정상회담 에 의해 사건의 진상해명을 선반으로 하여 정치적 결착을 도모했다.

당시의 일이기 때문에, 언제쯤인지, 기억은 속담이 아니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 “중대한 사실?”을 알게된다.

일본 체류 중인 김대중의 신원보증인에게 당시 오히라 외무상이 됐다는 이야기를 긴히 하고 있던 경찰청 간부로부터 들려졌다. 만약 '사실'이라고 하면 한국에서의 반정부운동의 주모자의 신원보증인을, 일어날 정도로 일본의 외무성 정상이 맡고 있던 것이 된다.
☞차명 지인 아무나도 아니고 외무상(외무부장관) 실명으로 신원보증인 서줌

이 ‘사실?’이 표에 나오면 김대중 사건의 진상해명은 물론 한일관계 자체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했다. 그 때문에, 나름대로 판단하고, 이 “사실?”을 보도하는 것을 단념했다. 마음 속에 숨기고 은근하게 멈추면 관계자에게 확인하기로 했다.

사건 전 한국의 정치 정세는 어땠을까. 61년 5월 장교를 이끌고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62년 3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63년 10월 선거에서 윤 후보를 소차로 꺾고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 . 장기화하는 군사정권에 대한 반정부·민주화운동이 국민들 사이에서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71년 대선이 열렸고 박 대통령과 야당 '신민당'의 대변인으로 김영삼 등과 함께 활약하던 김대중 두 사람이 싸웠다. 선거 결과는 634만표 대 540만표와 약 90수만 표 차이로 현직 박 대통령이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김대중 후보 대통령선의 선전은 반정부·민주화운동을 추진했다.

그 직후 김대중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는 사고가 일어났다. 박 대통령의 강력한 정적이 된 김대중을 말살하기 위해 KCIA(한국중앙정보부)가 기획했다는 ‘음모설’도 있었다. 김대중은 이 부상 후유증 치료나 해외 동포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종종 미국과 일본을 찾아 반정부·민주화 운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90만이라는 표차에 위기감을 불어넣은 박 정권은 정적 김대중의 반정부 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그의 해외 체류 중인 72년 10월 '비상계엄령'을 발령했다. 이 때문에 김대중은 국외로 망명한 것도 당연해져서 심각하게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됐다.

이 다음해 김대중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보도를 바탕으로 사건의 개요를 정리했다.

                                                ◇
73年7月25日から、日本に滞在してた金大中が、8月8日の白昼、宿泊中の東京・千代田区の「ホテル・グランドパレス」から、複数の韓国人により拉致された。その後、行方不明となり、6日後の8月13日になって、韓国ソウル市内にある自宅に、目隠しをされ、傷だらけの姿であらわれた。この事件の全貌については、その後、韓国の有力紙が「KCIA」の“極秘資料”を入手したとして明らかにしている。この他にも様々な報道がされてきた。

当時の日本政府は、田中首相、大平外相の時代であった。後に発刊された『大平回想録』によれば、日米首脳会談から帰国したばかりの大平外相は、静養先の箱根で事件発生を知らされた。外相は「この事件は、日本の主権に対する侵害が絡む複雑かつ深刻な問題」と認識していたという。

金大中本人は、当時の会見で「ホテルの廊下で麻酔薬をかがされ連れ出され、自動車で大阪らしいところに運ばれた。その後大きな船で韓国に連れてこられた」と拉致された模様を明らかにしている。

この年の9月になって、日本の捜査当局は、現場に残された指紋などから在日韓国大使館の金東雲一等書記官が、事件に関与していた事実を突き止め、韓国側に任意出頭を求めたが、事実上拒否された。また本人も、すでに日本にいなかった。その後も、韓国政府は「金書記官の帰国を認めたが、事件には無関係」との態度を貫き通した。このため、事実関係をめぐる両国の主張は、平行線をたどっていた。

日韓両国には、暗い過去の歴史があり、また国交が正常化されたとはいえ、当時の両国関係は、必ずしも良好なものではなかった。

このままこう着状態が続けば、両国関係は抜き差しならない外交的亀裂を生じる可能性もあった。事件発生直後は、極力政治レベルのものにせず、この問題に対処していた大平外相も「お互い独立国家として、長期の友好関係を考慮する必要がある」として、事態打開のために、高度の政治判断による決着に傾いたといわれる。

73년 7월 25일부터 일본에 체재했던 김대중이 8월 8일 백일, 숙박중인 도쿄 치요다구의 '호텔 그랜드 팰리스'에서 여러 한국인들에 의해 납치됐다. 그 후 행방불명이 되어 6일 후인 8월 13일이 되어 한국 서울 시내에 있는 자택에 눈가리개를 치고 상처 투성이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의 전모에 대해서는 이후 한국의 유력지가 'KCIA'의 '극비자료'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다양한 보도가 되어 왔다.

당시 일본 정부는 다나카 총리, 오히라 외무상이던 시절이었다. 이후 발간된 '오히라 회상록'에 따르면 미일 정상회담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된 오히라 외무상은 정양처의 하코네에서 사건 발생을 알게됐다. 외무상은 “이 사건은 일본의 주권에 대한 침해가 얽힌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했다고 한다.
☞일본내 김대중 납치 소식을 현지에서 전해듣고 일본 주권 침해의 심각성으로 인식했다는 오히라 외무상

김대중 본인은 당시 회견에서 "호텔 복도에서 마취약을 씌워 데리고 나와 자동차로 오사카다운 곳으로 옮겨졌다. 그 후 큰 배로 한국으로 데려왔다"고 납치된 상황을 밝혔다.

올해 9월이 되어 일본 수사당국은 현장에 남겨진 지문 등에서 재일한국대사관 김동운 일등서기관이 사건에 관여했던 사실을 밝혀 한국 측에 임의 출두를 요구했지만, 사실상 거부되었다. 또 본인도 이미 일본에 없었다. 그 후에도 한국 정부는 "김서기관의 귀국을 인정했지만 사건에는 무관하다"는 태도를 취했다. 이 때문에 사실관계를 둘러싼 양국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한일 양국에는 어두운 과거의 역사가 있어, 또 국교가 정상화되었다고는 해도, 당시의 양국 관계는, 반드시 양호한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이렇게 착상이 계속되면 양국 관계는 외교적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다. 사건 발생 직후에는 최대 정치 수준의 것이 아니라 이 문제에 대처하고 있던 오히라 외무상도 “서로 독립국가로서 장기적 우호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사태 타개를 위해 고도의 정치 판단에 의한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얼마나 사건을 신경 썼는지 알 수 있음.

                                                    ◇
ところで、当時、日韓両国は入国査証(ビザ)を取得するためには、入国先の身元保証人が必要であった。金大中の場合、この身元個人名かどうか不明だが、当時の大平外相のサインがあったとのことだ。

朴大統領にとっては、金大中が最大の政敵であり、反朴運動の首謀者でもあって、“政治犯”も同然であった。こうした金大中の日本入国に際し、日本の外務省首脳が、身元保証人を引き受けていたとなれば、韓国側は、国家間の信義に反する重大な外交問題だとして、日本政府に事実関係の究明を迫ることは必至だろう。となれば、金大中事件の真相究明どころか、政治決着もおぼつかなくなる。さらには、日韓関係そのものが、重大な局面を迎えたことだろう。

金大中拉致事件に、韓国の公安当局者が関与したことは、日本側の捜査で明白である。最終的には、事実関係をうやむやのまま、“政治決着”を図ったことは、大平外相にとっても苦渋の選択であったに違いない。

こうした背景に、“身元保証人問題”が事実だとすれば、何らかの影響があったのではないか。

この“事実”関係について、ほとぼりがさめたら、当事者に確認するとともに、引き受けたわけをただしたいと思っていたが、日常の取材活動に追われて、確認できないままに、当事者もすでに他界されており、真相は“藪の中”……。

그런데 당시 한일 양국은 입국사증(비자)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입국처의 신원보증인이 필요했다. 김대중의 경우 이 신원 개인명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당시 오히라 외무상의 사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에게는 김대중이 가장 큰 정적이고 반대운동의 주모자이기도 했고 ‘정치범’도 맞았다. 이러한 김대중의 일본 입국에 즈음해, 일본의 외무성 정상이 신원 보증인을 맡고 있었다면, 한국측은, 국가간의 신의에 반하는 중대한 외교 문제라고 하고, 일본 정부에 사실관계의 규명을 강요한다 것은 필연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김대중 사건의 진상 규명은 커녕 정치결착도 어지러워진다. 게다가 한일관계 자체가 중대한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외교문제로 비화될경우 위험부담이 상당했음에도 보증서준 오히라.

김대중 납치사건에 한국 공안당국자가 관여한 것은 일본 측 수사에서 분명하다. 최종적으로는 사실관계를 어지럽히지 않고 '정치결착'을 도모한 것은 오히라 외무상에게도 힘든 선택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배경에, “신원 보증인 문제”가 사실이라고 하면, 어떠한 영향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사실”관계에 대해서, 시간이 흐르면, 당사자에게 확인하는 것을 비롯해 맡은바 소임을 다하고 싶었지만, 일상의 취재 활동에 쫓기다보니 확인 못한채로, 당사자도 벌써 타계하여, 진상은 “안개 속”…
https://www.jnpc.or.jp/journal/interviews/22382

金大中拉致事件 | 取材ノート | 日本記者クラブ  JapanNationalPressClub (JNPC)

北朝鮮による日本人拉致事件が新聞・テレビで大きなニュースとなったが、拉致事件といえば、いまから30年前、韓国の公安当局が、当時、韓国の反政府・民主化運動のリーダー格だった

www.jnpc.or.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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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에서 납치를 당해 바다 한가운데 밧줄과 돌로 수장될 뻔한 위기를 일본의 해상자위대가 추격해와 구사일생으로 살고 납치괴한들은 작전을 바꿔 자택근방 뒷골목에 풀어주었다.


오히라 뿐만 아니라 일본 고위층과 인연이 있는것으로 보이고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 생명의 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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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中大統領を大事にした福田赳夫首相
김대중 대통령을 아꼈던 후쿠다 타케오 전총리

――金大中(元大統領)と福田赳夫を会わせる機会をつくったと、あるところに出ていましたが。
김대중(전 대통령)과 후쿠다 타케오를 만날 기회를 만들었다고, 어디서 그렇게 나왔던데요.

彼が何日か予定に従って行動した後、再び私のところに来まして、「私が日本に来たところで、誰か将来つきあうことによって韓国のために、私のためになる人はいないかね」と言うので、「福田赳夫さんだったらどうかね」と言ったら、「そんな人に会えるの?」というんです。「連絡してみる」と。それで福田赳夫先生に紹介したら、こいつが口が上手でしょう。べらべら喋って、あのときはあんまり反政府で固まっていない、生ぬるい時代ですから内容は激しくはなかったけれども、「韓国は38度線を守っているので、日本は韓国に援助をするのはあたりまえ中のあたりまえだ」と、こんな誰も言う話をまたするから福田先生が聞き飽きちゃって、「ああ、よくわかりました。ところであなた、いまは幾つ?」「39」とか何とか言ったら、「いやあ、お兄さん」と。突然お兄さんと呼ばれて金大中はびっくりして、「何がお兄さんです」と。私もびっくりしたら、「私は明治39年生まれだけれども、あれ以来年をとっていないから、お兄さん。39だから自分より1つ上だ」というので、「1つ上のお兄さん」と言って、金大中には非常に印象深く植えつけた会合でした。僕は、「おまえ、38度線はもうみんな聞き飽きているよ。あれはもう二度と言うな」と言ったら、「いや、私は韓国人として言うのはそれしかないじゃないか」というのが、最初の頃でした。
그가 며칠 예정대로 일정을 지낸 뒤 다시 내게 와서 "내가 일본에 왔을 때, 누군가 장차 오래 사귀면서 한국을 위해, 나를 위한 사람 누구 없을까"라고 말하기에, 「후쿠다 타케오씨라면 어떨까」라고 말하자,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연락해 볼게」라고. 그래서 후쿠다 타케오 선생님에게 소개하니, 이 녀석이 언변이 능하지요. 쏼라쏼라 말하고, 그 때는 그다지 반정부에 굳어지지 않은, 초반이던 시절이기 때문에 내용은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은 38도선을 지키고 있으므로, 일본은 한국에 원조를 하는 것은 당연 중의 당연하다"라고, 이런 누구한테나 말하던 이야기를 또 하니깐 후쿠다 선생이 듣다가 질리게 되어, "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당신, 지금은 몇 살?" "39"인가 뭐라고 하니 "이야, 형"이라하니 갑자기 형이라고 불린 김대중은 깜짝 놀라서 "뭐가 형입니까"라고. 나도 깜짝 놀랐는데, "나는 메이지 39년생이지만, 그 이후로 나이가 안먹어서, 형. 39면 1살위다."이라고 말해 김대중에게는 매우 인상 깊게 남은 회합이었습니다. 저는 "너, 38도선얘긴 이제 다들 질렸어. 두번 다시 하지마"라고 말하자 "아니, 내가 한국인으로서 할 말은 그것 밖에 없지않은가"라고 말했던 초기 시절이었습니다.

それ以後、金大中が野党党首になったときに福田先生が日韓協力委員会の委員長として行ったときに、金大中が「先生、あのとき以来ですね」と言ったもので、福田は非常に気持ちがよかったらしい。みんなに「金大中という野党のやつが、昔からの深い友情があるようにしてくれた」と。僕にも、「崔さん、あのとき会っといてよかったよな」と言っていました。
그 후 김대중이 야당당수가 되었을 때, 후쿠다 선생님이 한일협력위원회의 위원장으로 갔을 때 김대중이 “선생님, 그때 이래군요”라고 말한 것으로 후쿠다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고한다. 모두에게 "김대중이라는 야당의 녀석이 옛날부터 깊은 우정을 잇도록 해주었다"고. 나한테도, 「최씨, 그 때 만나가지고 다행이야」라고 말하였습니다.

――福田さんが?
후쿠다 씨가?
崔 はい、とても嬉しかったらしい。
최   예 엄청 기뻤던 모양입니다

https://toyokeizai.net/articles/-/589804?page=2

戦後日韓関係を舞台裏で支えた韓国知識人の独白

――金大中(元大統領)と福田赳夫を会わせる機会をつくったと、あるところに出ていましたが。崔 金大中君が国会議員になって初めて日本に来たとき、私は既に狸穴(編集者注:東京都

toyokeiza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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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김대중 전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코이즈미 전총리, 아소 타로 전총리가  분향소에 조문한 바 있다.

http://m.jpnews.kr/1383

[JPNews 일본이 보인다! 일본뉴스포털!] 도쿄에 마련된 김대중 전대통령 분향소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하기 위한 조문소 및 분향소가 일본각지에 마련됐다.  도쿄의 경우 주일본국한국대사관(이하 `주일대사관`)을 비롯해 신주쿠 코리아타운의 재일본한국인연

m.jpnews.kr


고이즈미 전총리, 아소 다로 총리도 조문해
먼저 도쿄 미나토구(港区)의 주일대사관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장으로 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서거 다음날 8월 19일 오전부터 분향소 운영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대사관 1층 접견실 내에 임시로 만들어진 분향소에는 평일인 탓에 찾아오는 사람은 적어 보였다. 하지만 관계자에 따르면 "대사관 주변의 한국기업 주재원이나 회사원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분향소를 찾고 있다"고 한다.

또한 유학생들과 가족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 주말이 되면 많은 한국인들이 찾을 것을 예상, 분향소가 운영되는 23일 18시까지는 직원들이 조를 짜 특별 근무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분향소는 한국을 대표하는 대사관답게 많은 외국공관과 일본 정치인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분향소에는 현재 고이즈미 전 총리를 비롯, 내각 대신들의 추모행렬은 물론, 21일 오후 8시 30분경에는 아소 다로 총리도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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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는 맞춤법

생각 2021. 5. 24. 23:13

자초지정
단백하다
받아드리다(take의 존대말 아닌 understand의미로 잘못쓸경우)
김치를 담구다
소포를 붙이다
단합 (담합의 의미로 잘못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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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레즈

생각 2021. 5. 23. 07:04

유튜브가 검색한걸 결과에 내는게 아니라 2단쯤에 추천영상을 띄운다ㅡㅡ

나이 먹을만큼먹어서 레즈 할머니 유튜버가 나온대도 놀랍진 않을건데 추천에뜬건 레즈관련 영상은 아니었고 채널 들어가서 알게됨. 사실 지독한 얼빠인데 출중한 외모라 궁금해서 들어갔는데 홀려서봄.

어릴때 팬픽 읽었었는데 지금생각하면 왜그랬나 싶음. 여학교라 휩쓸려 그랬는지 금단의 사랑이 땡겨서 봤는지 모르겠음. 현실 게이새끼는 여혐쩐다는거 알면서 이젠 게이소설도 게이싫어짐. 옛날에 퀴어물 찾아보고 했는데 본능적으로 거북함. 레즈물은 희귀하기도 하고 아가씨는 볼만했음.
내주변엔 레즈 없다고 생각했는데 건너건너 레즈한테 고백받은 얘기 듣고 나라면 생각해봤는데 무리. 키스가 상상안되고 본능적으로 소름끼침. 여자가 여자한테 잘해주는건 연애상대로서 오해가 없기 때문임.

근데 그 유튜버 선이 고와서 쟤라면 키스 가능하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뭐지? 나 완전 이성애자인데 혼란을 느끼며 영상 몇개를 더봤는데 아름다운 사람인건 분명하지만 나는 연애상대로서 도덕수준은 같되 좀 다른유형의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는거 같다. 나를 보완해줄수 있는. 정신적교감도 중요한데 같은 여자로서 같은 생각을하는게 상대를 탐구하는 재미가 떨어질거같다. 키스는 가능하지만 연애는 못할거 같다.
여기까지 오는데 근본적으로 남자를 만나는 이유까지 생각해보게 됐는데 큰키에 큰손, 여자에 없는 근육, 지켜줄거란 믿음, 정신적교감 등등 상당이 신체적&정신적 차이에서 오는 것들이다. 남자의 신체적 우세가 나를지켜주는게 아니라 가정폭력 우려와 성병우려가 있어서 치명적인 단점에 질려+ 동성끼리 같은 생각하는데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동성애할수도 있겠다 싶음.

처음으로 내 성향을 의심했던 경험. 미인과 미남은 한끝차이긴함. 그리고 학창시절 친구끼리 질투하고 집착했던건 있지만 나한테 그건 사랑은 아니었음. 내편 내또래가 중요한 시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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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말이 다 맞긴함

생각 2021. 5. 22. 11:56

일반 라면은 먹어도 컵라면 못먹게했는데 환경호르몬 때문에 엄마가 교통사고 당하셔서 입원했을때 처음으로 컵라면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밖에서 몰래 사먹곤 했다.

요즘 할수 있는 한도내에서 no 콩(gmo가능성 높아서 가급적 피하고 싶음), no플라스틱, 쓰레기줄이기 하는데 지금생각하면 컵라면 지금처럼 종이용기도 아닌데 뜨거운 물부어서 플라스틱 용해되고 아휴... 내분비계장애물질에 대해 많이 보도됐지만 먹으려면 어쩔수없다, 그걸 어떻게 다지키나 그생각에 무시했었다.

플라스틱으로 음식 담아먹는 것에 심각성을 깨달은후 배달음식 플라스틱용기로 싸주는 데가 태반이라 피자 빼고 거르고 있다. 특히 떡볶이는 정말이지 플라스틱 덩어리 으으 식욕떨어짐

어릴때는 토마토에 설탕 딸기에 설탕 뿌려먹었는데 나이들슈록 당을 싫어하는게 물론 당뇨 관리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20세이후론 노화되는데 미각만은 30대~40대 돼야 비로소 미묘한 맛차이를 구별하는 미각발달이 완성되고 이후 쇠퇴하는 것. 그래서 어릴 때 못먹던 것도 커서 먹을 수 있게되고 단맛으로 떡칠하지 않아도 고유의 맛으로도 맛있음을 느낄 수 있게된다.

과일에도 당이 있으니 천연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gmo가 걱정스럽다. 우리나라는 gmo표시가 의무가 아니여서 소비자가 알고 거를 방법이 없다. 콩과 옥수수는 최대한 피하고 있다. 식용유랑 간장을 지금 있는거 다먹으면 좋은걸로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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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식사예절 못배워먹은 한국인 너무 많아서 한국내에서면 그러려니 하는데 유튜브를 타고 자기도 먹방 신기해서 가끔 한국인 먹방보는데 식사예절 지적하는 외국인 지인이 있어서 개쪽팔렸다.

한국인이 제일 고쳐야할 1순위 식사예절은 밥먹을 때 입다물지 않고 먹는거. 정말 이거 기겁하고 비위상함. 외국인 지인이 하는 말이 개가 입벌리고 먹는다고 그럼..ㅡㅡ
2순위 후루룩 소리 내는거. 국물먹을 때나 특히 면요리 먹을 때. 라면광고 죽여버리고 싶음. 원래 한국 식사예절에서 면소리도 내는거 아닌데 한국인중에 소리 안내고 먹는사람 1천명에 한명 볼까말까함. 먹방중에 소리 안내는 유튜버 못봄. 설상가상으로 '면치기'니 뭐니 숨도 안쉬고 안끊어먹는거 방송에서 조장해서 더시끄럽게 쳐먹음. 최악.

이외에도 고전의 쩝쩝충, 그릇 숟가락 긁는소리 내는거, 수저로 그릇 옮기는거, 팔꿈치 식탁에 기대는거 두말하면 입아픈데 대부분의 한국인은 잘못됐다고 의식조차 없고 애초에 아무 생각이 없음. 지키고 싶지 않은 예의를 지적하는 사람만 꼰대됨.

웃긴게 패션에 대해서는 ㅇㅇ안하면 안되는 유행 ㅁㅁ하면 한물간 패션 ㅂㅂ는 나이든 사람이나 입지. 이런 편견어린 편협한 시선으로 똘똘뭉쳐있음. 원래 나는 유행 신경 안쓰고 내스타일대로 입는 편이긴 하지만, 일반캡모자 쭉 썼는데 스냅백 안쓴다고 유행 웅앵하던 것들 다시 캡씀. 지나 패션의 첨단 걷든말든 개인의 개성의 영역을 유행의 잣대로 들이밀고 너는 왜 A안해 하는건, 준거집단에 편승하려는 '또래효과'였나 사춘기에 졸업했어야 할거를 20대 넘어서도 하면 그건 몰개성적이고 포용력이 낮은거다. 그러나 아무도 문제의식이 없다. 그래서 획일적인 틀안에 똑같은 옷만 입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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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찬란한 역사는 없음... 메이지 유신이후 전성기를 맞았으나 헤이안시대만 해도 귀족 차림새부터가 꼬름함. 메이지는 탈아입구하느라 서양복식 입었고 그마저도 제국주의 전쟁하느라 학살과 전쟁범죄로 역사가 점철돼있음. 잘알고 있는 관동대학살, 난징대학살 외에도 인도네시아 죽음의 철도 많음.
나라의 근본이되는 선사시대 구석기시대가 많이 빈약했고 '신의 손'이라고 불리는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가 날조 유적으로 일본 고대사를 10만년이나 땡긴던 전대미문의 역사날조사건이 들통나 개망신당함. 쓸무위키에 '아마추어'라고 하는 개소리 거르자. '신의손'으로 일본의 석기시대 연구에서 '톱'이라고 추앙받던거 일본어로 검색하면 수두룩함ㅋㅋㅋ 어느나라 아마추어가 학계탑먹냐ㅋㅋㅋㅋ 後述の捏造事件発覚まで、藤村は旧石器時代の上限を十万年単位で遡らせるとされた発見・研究報告を次々とあげ、日本の前期・中期旧石器時代研究のトップグループの一人と見なされていた。



중국
중국의 역사 컴플렉스는 일본과 다른 양상을 보임. 1 분서갱유, 문화대혁명으로 역사 지우기 2 남의역사도 지거로 우기는 생떼. 중국은 반만년 역사를 가지고있고 문화도 학문도 역사도 위인도 너무많음. 진시황이 있을때도 지금보면 옛날이지만 기원전 역사까지 갖고 있으니 나라로서 체계가 잡혀있고 제자백가 난립하던 시기라 학자가 많고 정치사상적으로 잘난사람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왕입장에선 숙청이 필요한것. 새나라 세우면 옛날나라 대신들 숙청해서 옛날에 이랬고 전통이 저랬고 거품물게 뻔한 정적들 싸그리 없애서 새시대 기반을 만드는 것과 같음. 문화대혁명 역시 모택동이 감히 위대한 문화유산을 쳐부수자가 아니라 우린 새롭게 태어나야한다는 미명아래 선동한것도 과거의 위인과 사상에 필적할수 없음을 잘알고 있고, 기반을 없애는 김에 정적도 제거하고, 자기만의 사상으로 간섭없는 새세상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위인도 부관참시 할뿐아니라 살아있는 학자들도 많이 죽였다. 모택동과 진시황은 사상이 인간을 지배한다는걸 너무나 잘알고 있었다.
다 죽여서 남의 나라 역사도 지거라고 하는 것도 있고 1과 2는 인과관계의 전부는 아니지만, 실제로 자기손으로 제거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김에 잃어버린 역사의 연결고리를 공산당의 왜곡으로 채우려는 것과 소수민족의 독립방지를 위한 밑작업으로 역사를 동원하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깔려있다.
지나족의 나라지만 땅을 먹기위해 소수민족을 포용하는척 역사날조를 감행했다. 2000년대 초반만해도 고려, 고구려 역사를 중국거라고 하면 중국내부에서조차 미친놈 소리 들었지만 20년만에 중국내 역사교육 그리고 세계 출판사에 돈로비한 결과 중국 변방 역사로 둔갑해버림. 같은방식으로 위구르, 티벳도 역사 날조로 먹음. 만주족의 역사는 엄연히 몽골것이지만 만주족의 역사를 인정해버리면 지금의 중국땅 자체가 몽골것이 돼버리고 정통성을 잃게되므로 개소린지 알면서도 만주족도 중국, 칭기즈칸도 중국인이라고 억지부림.
한족아닌 역사를 몽땅 빼면 중국은 찰나밖에 없으니. 만다린이라는것 자체가 满大人임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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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예수  2020-08-30 02:18 13911 |

저는 미국 뉴욕인근에서 치과로 밥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한국과 미국의 친인척들중에 의사들이 좀 있다보니 미국과 한국의 의사들의 인식차이를 좀 비교해볼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저는 한번도, 그리고 꿈에도 제가 상류층에 올라갈수 있을거란 생각을 해본적도 없고 그냥 주어진 위치에서 감사히 일을 할 뿐입니다. 가끔씩 환자들이 힘들게 일하는 저를 가엽게 여겨주고 그걸 저는 감사히 생각합니다.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힘들겠다며 참 많이들 위로해주십니다. 재력이 되는 환자분들이 좀 있다보니 가끔씩 그들의 자녀들이 월가에 진출해 어마어마한 성공을 이루는걸 보고 같이 기뻐해주기도 하지만 또한 월가가 뭐가 대단하다고 그렇게 빨리 부를 이루는지 씁쓸하기도 합니다. 제 환자들중에 의사들이 꽤 많습니다. 다들 전형적인 중산층들 입니다. 치과 치료비에 다들 숨 막혀하고 부담스러워하지만 그래도 묵묵히 완납들 하시구요. 다들 알뜰하고 깐깐한 배우자분들 대동하시고 와서는 치료비를 흥정을 하기도 하고 분할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차 타는걸 보나 사는 집들을 보나 다들 빼박 중산층들 입니다. 초대를 받아서 가보면 텃밭도 일구고 깻잎과 호박도 심고 김치도 해먹고 그냥 전형적인 증산층의 한인들입니다. 

 

제 처남은 서울의 가장 유명한 의과대학 병원의 과장입니다. 몇년전에 교환교수로 가족들이 미국의 저희 동네에 왔습니다. 거의 골프만 치다가 갔는데.. 일년동안 가장 많이 들은소리는 “이것들이 내가 누군줄 알고…” 입니다. 한국을 떠나올때도 제약회사 직원들이 집에서 공항까지 모시고 가고 이곳 공항에 도착해서도 현지 직원들이 모시러 오고… 참 대단한 의전이더군요. 미국 골프장에는 캐디들이 별로 있는곳이 없습니다. 채 가져다주고 퍼팅라인 봐주는 캐디 없다고 미국에서 골프치기 싫다고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래도 달리 할게 없다보니 여기서는 매일 골프만 치다가 갔습니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의 병원에 교환교수로 왔지만 그리고 지도교수가 노벨상을 목표로 연구하는 의사지만 맘에 안든다고 그리고 미국의사들은 실력과 손기술이 없다는 이야기만 하다가 갔습니다. 한국에서 오는 의사들은 꼭 한국의사들 손재주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도 치과의사로 손재주로 먹고 살긴 하지만 한국사람들이 꼭 손재주가 어마어마하게 특출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손재주만 강조를 하는게 좀 위험하다고도 생각합니다. 의사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테크니컬한거보다 진단입니다. 하물며 테크닉이 중요한 치과에서도 제가 무수히 들어온 말이 절대로 테크니션 되면 안된다. 진단이 가장 중요하다 였습니다. 일전에 한국에서 온 판사가 하버드 법대로 교환교수로 왔었을때 만난적이 있는데 미국애들 암기력 떨어진다고 비웃는거 본적이 있습니다. 말한마디 섞지 못하면서 멀찌감치 보면서 하버드 별거 없네. 학생들 머리가 사법연수원 애들보다 떨어지네 그런 이야기 들어주느라 힘들었습니다. 저희 처남도 거의 같은 인식이 있더라구요. 정말 일년내내 미국 좆같고 미국 의사들 별거 없다는 이야기만 하다가 갔습니다. 

 

한국에 가면 보는 제 동창 한명도 서울의 대학병원 교수입니다. 만날때마다 느끼는거지만 모가지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부러질것만 같습니다. 거의 왕입니다. 그리고 귓속말로 그럽니다. 자기가 여기선 왕이라고. 한번은 학회에 구경오라고 해서 갔는데 거기 직원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시키는데 차갑지 않다고 호통을 치고 다시 가져오라는걸 목격한적이 있습니다. 와~ 위세가 장난이 아닙디다. 제가 골프치는걸 좋아해서 한국에 가도 꼭 골프를 치기는 하는데 이런것들이랑 치는게 너무 부끄럽습니다. 뒷짐지고 볼까지 걸어가서 꼭 캐디가 채 가져오기까지 기다리다가 다른채 가져오라고 똥개 훈련시키고… 정말 보기 민망해서 “야 내가 가져다 줄께. 뭐 줄까” 하고 가져다 준적도 많습니다. 그리고 퍼팅 안들어가면 캐디한테 지랄지랄 하고. 아니 아무리 잘 가르켜줘도 지가 그대로 못치면 안들어가는건데. 

 

대학병원 교수가 연봉이 대단하지도 않은데 젊어서부터도 꼭 강남 아파트만 고집하더니 그리고 입주한 강남 아파트들은 여지없이 오르더군요. 지금은 자이 60평에서 사는데 아주 목에 기브스를 하고 다닙니다. 사는게 너무 즐거워보이고 부럽기도 합니다. 미국에 있는 저는 버는 돈 말고는 재테크로 이렇게 성공을 해본적이 없어서 부동산으로 이렇게 재력이 상대가 안되니까 정말 배가 아파서 죽겠습니다. 저도 돈은 좀 버는데도 그런 생각이 드니 한국에서 열심히 사는 중산층들은 얼마나 부동산을 바라보며 소외감을 느낄까요. 민주정권하에 종부세 올리는걸 가지고 온갖 욕이란 욕은 다하면서 미국의 재산세에 반에 반도 안되는걸 이야기해주면 미국은 미국이고 한국은 한국이다 라며 주체적 사상을 설파하기도 합니다. 

 

60대 한국의사들 보면 정말 돈 많이 번 사람들 많은거 같습니다. 4,50대 한국의사들 보면 선배들만큼 돈을 벌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조급해하는걸 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의대 정원 늘린다니까 다들 개 밥그릇 뺐긴 개새끼들처럼 달려드는듯 합니다. 그런데 지들이 미국처럼 그냥 중산층으로 살걸 알고 그리고 포기하면 편할텐데. 그걸 못해서 저 지랄들을 하나봅니다. 

 

미국에선 돈 많이 벌고 싶으면 Business 하면 됩니다. 월가에 진출하건 IT 사업을 하건 비즈니스를 하면 됩니다. 미국에서 의사는 돈 잘버는 직업이 아닙니다. 여기 한인 학부모들이 자식들 의사시켜서 신분상승하려고 하는데 상승 안됩니다. 그리고 의사 해서 돈벌려고 하면 면허 뺏기고 감옥가는 경우 많습니다. 미국의 경우 빈곤층과 노인들은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보험이 빵빵합니다. 거기 눈먼 돈이 많다보니까 유태인과 한국인 의사들이 보험사기 어마어마하게 치고 면허 박탈당하고 감옥가는 경우 많이 봅니다. 마취과, 재활의학, 정형외과 등등의 과에서 보험 사기로 FBI에 걸려서 패가망신하는 경우 많습니다. 여기 주정부 의사협회 웹사이트 가면 다 나옵니다. 무슨 사기 쳐먹다가 면허 박탈되는지… 미국에서는 의사에 대한 반감이 확실히 없습니다. 왜냐면 평균 이상의 머리와 학력으로 돈보다는 인술을 펼치고자 선택을 했으니까요. 그렇다고 뭐 존경을 받거나 그런것도 없습니다. 잘못하면 의료소송으로 어마어마한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법정에 불려다니기도 하고 면허를 영구박탈당하기도 합니다. 한국처럼 한번 면허따면 죽을때까지 봐주고 그런것 없습니다. 통증병원 차려놓고 노인들 보험으로 사기쳐서 어마어마하게 부를 축적해놓다가 걸려서 벌금으로 수백억씩 토해내고 의사 삼대가 감옥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면허 박탈당하고 아침에 감옥에 가서 창살안에 갇혀있다가 오후 5시가 되면 감옥에서 나와서 집에 가는 그런식의 형을 받기도 합니다. 출퇴근형 감옥살이죠. 고등학교때 반짝 공부 잘해서 의대갔다고 윤리의식이 남들보다 투철해지는것도 아니고 지들이 뭔 사회지도층입니까. 그런 인식부터 없애야합니다. 그냥 기술직입니다. 

 

수면마취하고 대장내시경 받고 마취깨면 의사가 와서 괜찮냐고 물어보고 물도 떠다주고 합니다. 저도 환자들 대기실에서 기다리면 커피도 가져다주고 합니다. 화장실 더러우면 장갑끼고 변기도 닦고요. 점심값하라고 팁주는 환자들도 있습니다. 감사히 받고 90도로 숙여서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걸로 맛난거 사서 간호사들과 점심 같이 먹고요. 

 

한국에서는 일반 대중들의 의사들에 대한 적개심이 확실히 있는듯합니다. 그러다가 코로나 상황때 칭찬도 좀 받고 하다가 이번에 파업으로 완전 악질 부르조아로  인식되는듯 합니다. 지들이 사회 선도를 하는 엘리트 계층이라는 잘못된 인식때문인듯 합니다. 이번에 국민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아주 나쁜 결정을 한듯 합니다. 제가 운영하는 작은 회사가 하나가 있습니다. 똑똑한 직원이 하나 있는데 제가 사업적으로 위기가 찾아올때마다 와서 연봉협상을 합니다. 정말 위기때를 꼭 골라서 와서 연봉협상을 합니다. 일은 잘 하는데 평소에 제가 이 직원만 보면 좋은 감정이 안 생깁니다. 똑똑해서 데리고 있긴 한데 언전가는 꼭 복수를 해주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의사들 하는짓이 완전 같습니다. 이렇게 힘든 상황을 인질극 삼아서 자기 주장을 ( 그래봐야 밥그릇 챙기기)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전 세계가 코로나로 사투를 벌이는 이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으로 인질극을 버리는 이것들은 의사가 아니고 살인자들입니다.  꼭 손을 봐야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이글 전체를 동의하진 않지만 미국과 한국의 직업별 소득의 중간값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글이다.
충격적이지만 미국 마트 캐셔는 산수를 못해도 캐셔일을 할수 있다. 5900원이 나와 1만900원을 주면 5천원을 거슬러주는 머리가 없어도 할수 있다. 뭐 이런 바보라도 캐셔일쯤은 할수 있는게 미국이다. 어차피 거스름돈 화면에 뜨기도하고 단순노동에 스펙을 요구하지 않아도 인간다운 직업을 가질수 있게 하는 사회적 일자리수준에서 문화충격을 받은적이 있다.

한국에서 서울대 경영이나 경제를 나와서 스펙 빵빵한 신입이 돈 잘주고 연봉후하기로 유명한 금융회사에 취직한들 신입이 초봉8천은 택도없다. 그러나 미국 아이비리그에서 월가뿐 아니라 컨설팅기업도 특출난인재에 초봉으로 억대연봉도 가능하다. 그건 초봉이니까, 경력자의 연봉에 비교하자면 격차는 더욱 극심하게 벌어진다. 3억이상 연봉자가 한국에선 소수의 고액 연봉자지만 미국에선 절대다수는 아니어도 소수가 아니다. 미국의 세율과 건보료가 어마어마해서 실질임금은 그보다 떨어지지만 아무튼.

이세돌이 '상금으로' 번돈이 20억이라던데 세계 최고 바둑기사의 명예와 실력을 감안하면 그리 큰 돈은 아니다. 야구선수는 한국1등을 찍지못해도 받는 연봉에 비하면 더더욱. 한국에선 연예계나 프로선수, 유튜버, 인강강사쯤이 아니면 각분야의 탑을 찍어도 생각보다 벌지못하는 구조적인 한계가 느낀다. 일반인중에 비울적으로 백만장자가 많은 직업은 단연 의사.

그간 일반인이 자산을 늘리는 유일한 부동산 투기, 최근엔 코인과 주식. 주식이 그나마 투기 아닌 투자적 안목으로 가능성있는 산업을 육성하는 버팀목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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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우유

2021. 4. 21.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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