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매춘금지는 헌법에 반한다]
한국에서 매춘부 합법화 시위 날조
1-1. 이 나라의 전통적 직업입니다.
1-2. 다들 하고 있다! 너의 엄마도 여동생도
안해본 한국인이 어디있냐!
날조

2. 병장 나가센
진실을 말 못하는 세계

3. 퐁탕멘🤓
뉴스데스크 '차별범죄에 울분'
90%가 한국 떠나고 싶다 생각해 본 적 있어->한국여성 90% 직업으로서 매춘을 생각해 본 적 있어 날조

한국인이 단기로 돈버는것은 매춘밖에 없어>혐의 인정
진짜 저 말 했는지 알수 없으며 짜깁기 날조 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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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반한정서의 연원과 대책
作者:朱立熙
日期:2014-02-11

문화외교의 관점에서 본 대만의 반한정서에 대한 연원과 그 대책

대만 지한원(知韓苑)대표 주리시(朱立熙)
(1954~) 대만 역사학자. 국립정치대학 한국어문학과 졸업, 연세대 사학대학원 수료 한일관계사 연구,  스탠퍼드대학 일본학 석사.
1987 광주 민주화 운동 취재, 타이페이 타임즈 전 편집장, 중화TV 전 부국장, 국립정치대학과 국립대만사범대학 한국어문학과 겸임교수.


1. 대만 반한(反韓)정서의 연원
(1) 단교(斷交)의 배경
1980년대 이후 한국정부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6˙23선언>(1973년)에 이은 <북방정책> 추진에 가속페달을 밟으면서, 그 동안 대만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중국과 가까워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대만은 어찌 해 볼 도리 없이 조만간 맞이하게 될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대만-한국 관계가 이러한 긴 변화 과정 속에 놓이게 된 데는 대만이 자체의 국가정체성 문제로 인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경직된 외교노선을 수정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가장 큰 책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만 스스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포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방국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므로, ‘신의를 저버렸다’ 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무릇 한 나라의 외교정책은 ‘국익추구’를 최우선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들의 국익과 대만의 국익이 충돌하였을 때,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시 말해, 대만이 그들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대만 역시 그들과 같은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대만-한국 관계에 변화가 발생한 것은 1980년대의 대만사회가 이미 다원화된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정보의 교류가 빈번해지기 시작하고 국민의식 또한 성숙해질 무렵이었다. 때문에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는 가운데, 설령 대만이 자신의 외교정책에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것을 안다손 치더라도, 대만의 입장에서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실은 지난날 아시아의 대표적 반공국가로 형제의 정을 나누던 두 나라가 어째서 이별의 길을 가야 하는가 라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대만인들은 조만간 그들을 떠날 것이라는 한국의 거듭된 입장표명을 보면서 정서상 서운한 감정을 떨쳐버리기에는 그 반발심이 더욱 강렬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1983년 5월5일에 발생한 ‘중공민항기 납치사건’ 이었다. 당시 대만 언론에서는 이를 ‘6의사(義士)사건’ 이라 칭하였다.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한국과 중국의 관계 진전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하였지만, 한국과 대만의 관계에는 말할 수 없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사건 발발 후 약 1년 3개월 동안 대만-한국 관계에서 유일하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부분은 이 기간 동안 한국의 정책에 대해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후로 대만-한국 관계는 급격하게 나빠졌다.



‘6의사 사건’ 기간 동안 대만인들은 이어지는 언론보도를 통해 한국정부가 대만의 ‘반공귀순 의사’를 능욕하는 것을 보았다. 이로써 분위기는 더욱 격앙되었고, 거센 ‘반한정서’가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억울한 측면이 있다. 한국은 국제협약을 이행하고 6명의 비행기 납치범을 사법처리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대만은 애초에 국제법상의 지위가 없었던 데다가 당시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대만인들로서는 국제법상의 의무가 두 나라 간의 전통적인 우애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을 한국측에서 간과한 것은 분명하다. 반한정서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대륙과 대만을 막론하고)들은 한국인(또는 조선인)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중화의식’을 바탕으로, 중국인들은 과거 자신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반도의 사람들에게 선천적인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국민당의 의식교육을 받은 많은 대만인들은 난징(南京) 국민당 정부가 한국에 대하여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한 큰 공이 있으며, 한국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들은 또 전후 장제스(蔣介石)의 한국 독립 지지 및 김신(金信) 주중화민국대사와 장제스 간의 ‘의부자(義父子)’ 관계로 인해, 중화민국과 한국의 관계는 ‘종주국과 속국의 관계’ 에서 ‘부자관계’로, 전후에는 다시 ‘형제관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아우’인 한국이 되려 ‘형님’을 얕보고 있으니, 선천적인 우월의식에 후천적인 피해의식이 더해지고 양자가 서로 부딪히면서 대만인들의 반한정서는 자연히 더욱 더 고조되었다.



(2) 반한정서의 연원과 단교
1992년 8월19일 오후, 대만 입법원(立法院,한국의 국회에 상당) 외교위원회 위원들은 외교부로부터 첸푸(錢復) 외교부장이 직접 브리핑에서 중대사항을 발표할 것이라는 갑작스런 통지를 받았다. 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국회와 언론은 신경이 곤두섰다. 그 중대사항이라는 것은 한국이 8월 24일에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이며, 동시에 대만과 단교할 예정임을 대한민국 정부가 이미 대만 측에 통보하였다는 것이었다. 첸푸는 브리핑에서 ‘한국에 기만 당했으며, 한국이 배은망덕하고 신의를 저버렸다’고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단교 소식을 대만 당국이 먼저 발표한 것은 과거의 단교 사례와는 확연히 달랐다. 단교소식이 타이베이에서 서울의 외신매체로 타전되면서 모두가 사방으로 사실확인에 나섰다.



다음날, 첸푸 외교부장은 언론매체의 고위 책임자를 대상으로 다시 한번 브리핑을 열었다. 회견 내용은 전날 국회에서 한 것과 동일하였으며, 계속해서 한국을 비난하고 단교의 책임을 모두 한국의 ‘배신’ 탓으로 돌렸다. 기자 회견에서 그는 뜻밖에도 이 글의 필자인 나를 두 차례나 거명하며 현장에 있는 유일한 한국문제 전문가로서 단교 사건에 대한 견해나 건의를 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같은 요청은 갑작스러운 것임은 몰론 외교 관례와 상식에도 맞지 않는 것이므로 필자는 그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후 외교부 아태사(亞太司, 아세아 태평양국) 직원 등 브리핑에 참석했던 많은 국회의원과 언론 매체 책임자들은 ‘첸푸에 이용당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왜냐하면 첸푸는 국민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려 이틀에 걸쳐 대대적으로 한국을 비난하였고, 분명히 여론에 기대어 자신의 외교실정(失政)에 따른 잘못과 책임을 떠넘기려고 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단교 역사를 보더라도 외교부장이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여론의 갈채와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것은 보지 못하였다. 첸푸는 일부러 여론을 반한정서로 몰아감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모면하였기 때문에 여론의 사퇴 압력도 받지 않았다. 그의 외교부장 임기 내에 대만 최후의 두 큰 수교국가(다른 하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와 단교하였으나, ‘외교수재’라 불리던 첸푸는 사퇴하지 않고 계속해서 외교부장직을 이어갔다.



여기에는 그 개인의 감정적인 요소도 들어가 있다. 그의 미국 예일대학 박사학위 논문은 <한미 통상조약 체결 과정에서 청조의 역할>이었는데, 그의 한국관(韓國觀)에는 시종일관 대중화우월의식(大中華優越意識), 즉 종주국과 속국이라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로서는 당연히 ‘중화민국의 속국’으로부터 배반당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단교의 책임을 모두 한국에 돌림으로써 대만인들의 반한의식을 조장했으리라는 점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올해로 대만과 한국이 단교한지 21년이 되었다. 이제 전국민의 반한기류를 누가 만들어내었는지 대만의 외교를 다시 검토해보아야 하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첸부는 여전히 ‘대만 외교의 대부’로서 대만의 외교에서 양안관계의 위계를 어떤 외교관계보다도 우선시 하여, 마잉주(馬英九)정부로 하여금 이를 ‘최고지침’으로 삼도록 하고, 나아가 중국과는 ‘외교적 휴전’ 상태로 만들었다. 따라서 대만의 외교부는 ‘대륙위원희’의 산하로 편입된 처럼 일개 ‘외교국(外交局)’으로 전락할 지경에 이르런 정도다.



첸푸는 아직 생존해있지만 그의 외교실정에 대한 평가는 이미 내려졌다. 미래의 대만인 쓰는 역사에 그는 이렇게 기록될 것이다. ‘첸푸, 대만외교를 고립시킨 역사적 죄인!’



(3) 대만vs.한국
1971년의 ‘닉슨 쇼크’를 틈타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정부는 즉각 태도를 바꾸어 1972년에 서둘러 ‘중국 열차’에 올라타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이에 비해 한국은 꼬박 21년이 지나서야 중국과 수교를 하였다. 이는 미국(1979년에 중국과 수교)에 비해서도 13년이 늦은 것이다. 한국은 아시아의 대국 가운데 가장 먼저 대만과 수교하였으며, 또한 가장 마지막으로 단교하였다. 그 동안의 파란만장한 세월을 돌아보며 많은 한국 학자들은 감개무량하게 이야기 한다. ‘대만에게 우리도 할 만큼 한 셈이다’라고.


사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국민당 정권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국민당이 대만으로 패퇴하였을 때는 이미 ‘몰락한 귀족’이나 다를 바 없었다. 자신의 몸을 추스르고 국제정세에 대응하면서(한국을 배운다거나 서독의 ‘할스타인 원칙(Hallstein Doctrine)’을 포기하는 등) 자립의 길을 모색하기 보다는 ‘국-공 불공대천(不共戴天)’만 고집함으로써 국제적 고립의 길로 들어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장(蔣)씨 왕조’의 마지막에 남은 것이 결국 확연히 차이 나는 국-공의 입지라는 것을 대만인들이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현재까지 대만을 승인하는 국가는 대만인들이 약소국이라고 소홀히 여겼던 21개국 뿐이다.


어디까지나 ‘이별은 이해의 시작’이다. 단교로 인해 대만은 한국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제 새롭게 한국을 바라보고, 다시금 상호 신뢰를 쌓으며, 한국에 호감을 가질 기회가 생겼다고도 볼 수 있다. 친구의 ‘겉 껍데기’는 잃어버렸지만, 더욱 실질적이고 서로를 이해하고 소중히 여기는 내실 있는 친구가 될 수 있고, 과거의 중(중화민국)-한 관계에서 대만-한국 관계가 되면서 더욱 실속 있는 교류가 가능해졌다.


지금 대만인들에게 여전히 대중화의식이 남아 있고 한국을 업신여기는 우월감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외성인(外省人)’과 비교해서 본성인(本省人)에게는 그런 전통적인 심적 부담이 없다. 많은 한국인들이 대만에 와서 본성인과 지내다 보면 본성인이 외성인보다 더 친절하고 쉽게 사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외성인 : 1945~1949년 중국대륙에서 건너와서 이주한 중국인, 모택동VS장개석 전투 결과 장개석이 패배해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도피하면서 들어온 지나족
*본성인 : 외성인 이전 청나라~일제강점기 동안 대만으로 이주한 지나족

사실 본성인과 한국인의 최초의 교류는 일제시대에 있었다. 많은 조선의 군인들이 대만에서 대만군과 함께 훈련을 받고 동남아 전장으로 파병되었다. 그들은 함께 적들과 싸우면서 서로를 알게되고 형제와 같은 정을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이 ‘형제’가 결국 헤어짐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중국의 압력 하에서 중국에 대해 여전히 사대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는 한국이 섣불리 대만과 정치적 교류를 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 대만과 한국은 줄곧 유사한 발전 궤적을 보여 왔다. 모두 일본 식민 통치를 겪었고, 전후 정치,산업 발전의 속도 또한 비슷하였다. 피차 서로를 거울로 삼아 단점을 보완하고, 겸허하고 진지하게 서로의 장점을 배운다면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대만과 한국은 1980년대 말부터 민주화가 시작되었고, 1990년대 말 ‘과거청산’ 작업을 완수하였다. 또 2000년 전후로 모두 정권 교체가 이루어져 서양 민주주의 제도가 실현됨으로써 전국민이 자유、민주、인권이 보장되는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양국은 똑같이 유교문화권 국가로서 2차대전후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한 유일한 성공 사례로 평가 받고 있다. 이러한 성취로 인류문명의 발전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게다가 양국은 공통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다. 이러한 도덕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양국은 민주주의 발전이 뒤처진 국가에 대해 ‘인권외교’와 ’민주주의 문화의 수출’을 추진하기 위해 더욱 협력하여야 한다. 이는 양국이 민주주의의 과실을 따먹는 것에 대한 미룰 수 없는 책임이자 사명이다.



(4) 통일과 독립이 대립하는 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대만은 ‘정상국가’가 아니다. 따라서 ‘통상적인 기준’이나 ‘보편 가치’로 대만의 국가체제、대중매체、사법제도 등을 평가할 수는 없다. 대만의 모든 문제는 국가정체성(National Identity)의 혼동과 혼란에서 기인한다. 대만은 지금도 ‘중화민국’을 국명으로 삼고 있으나 많은 이들이 ‘대만공화국’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과 동일시하고 있다. (대만에서는 이들을 ‘좌통(左統): 좌파인 공산당으로 통일’이라 부른다. 극소수이며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는다.)
*대만내 통일파라면 민주주의로 통일이다


국가 정체성에 대한 불일치, 통일이냐 독립이냐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은 모두 ‘고향결정론’에서 기인한다. 즉, 자신의 고향에 대한 정체성에 따라 통일파와 독립파가 결정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한 화교의 정체성은 분명 고향인 산동성(山東省)이지 대만일 리가 없다.)
*재한화교 :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일컫는 말. 청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거주하기 시작한 중국인, 주로 배가 오가는 산동성 출신이며 중국과 정식 수교하기전 1992년까지는 일괄 대만국적을 부여했다.


소수의 ‘외래정권’인 국민당은 어떻게 대만에서 장기집권(1945~2000) 할 수 있었는가? 55년의 통치기간 동안 국민당이 의지했던 것은 첫째, 일본인이 남긴 자산을 당의 자산으로 흡수하고, 지방에서 대만 정치인을 매수하여 저변을 공고히 한 다음 매 선거에서 매표와 조작으로 정권을 유지하였다.(민주화가 실현되고서야 이러한 행위가 사라졌다.) 둘째, 당, 정,군(공무원과 군인은 대부분 국민당원임) 및 교육, 사법, 언론, 정보기관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와 장장 38년(1949~1987)에 달하는 계엄령으로 대만 사회 각 계층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고압적인 독재 하에서 국민당과 대만인들은 지극히 불공정한 상황에서 각축을 벌였다.


현재도 언론의 80% 이상(외성인에 의한 경영)과 교육계, 법조계의 대다수가 국민당원이다. 따라서 외성인이 주도하는 언론 보도는 자연히 대중화의식에 입각하여 중국 통일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경향이 있다. 동시에 이들의 한국관도 당연히 종주국으로서의 우월의식이다.


2011년 9월 정상기(丁相基) 주 타이페이 한국 대표부 대표가 취임한 이후 대만 언론이 선동하는 반한감정에 무척 곤혹스러워 하며 필자에게 자문을 구한 적이 있다. 어찌하여 대만 언론에서는 반일(反日)도(대만인들은 대부분 일본에 친근함을 느끼고 있으며 반일은 통하지 않는다.) 반미(反美)도 하지 않으면서 더군다나 현재는 반중(反中)도 하지 않으면서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반한(反韓)을 외치는가? 이에 대해 필자는 주 타이베이 한국대표부에서 대만 언론의 생태에 관하여 세 차례 강연을 한 바 있다. 대만인들이 국민당 치하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대중화의식을 가진 반한 인구가 약 70%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언론 종사자들은 잘 알고 있다. 대만에서 반한이 통하기 때문에 언론에서 이를 계속 이용하고 있으며, 필자도 마찬가지로 피해자가 되었다.


2. 대만인들의 한국관
(1) 대만의 인구구성
대만인들의 한국관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대만의 인구구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대만은 본성인과 객가인(客家人)이 인구의 85%, 1949년 국민당 정부와 함께 대만에 들어온 외성인이 13%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세 부류보다 훨씬 이전부터 대만에 거주하던 원주민(14개부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2%에 불과하다.
*객가인 : 명•청시대에 중원에서 밀려 서남지방으로 이주해 객가어를 쓰는 지나족.


1945년부터 2000년까지 대만인들은 국민당 독재정권의 일률적인 반공교육과 중화민국이 유일한 합법정부를 대표한다는 사상교육을 받았다. 심지어 지도에는 이미 오래 전에 독립한 외몽고가 포함되어 있을 정도다. 소수의 외성인이 쥐락펴락하는 교육체제 아래서 대만인들의 한국관에도 중화민국과 마찬가지로 허구와 환상이 존재한다.


국민당의 의식 속에서 ‘중한관계’는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의 관계를 가리키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로 칭하는 양국 간에 ‘형님’은 당연히 대만이고 ‘아우’는 한국이다. 이렇게 형성된 한국관에는 커다란 오류와 허위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2)노년, 중년, 청년 3대의 한국관
대만인들의 한국과에는 ‘하한(哈韓)’과 ‘반한(反韓)’의 양극화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哈’은 영어의 Hot에서 온 것으로 발음이 대만어의 ‘哈’과 유사하다. 따라서 ‘哈韓’은 ‘한국열기’ 또는 ‘한국사랑’을 나타낸다. 세대 구분에 따라 대체적으로 다음의 3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① 국민당세대(60세 이상):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로 대다수가 대중화의 우월의식으로 한국을 오랜 ‘아우’로 대한다. 절대다수가 외성인이며 본성인도 조금 포함된다. 이들 부류의 한국관은 우월의식으로 충만하지만 반드시 ‘반한’인 것은 아니다.


② 단교세대(40~50세): 단교 전 양국간의 갈등을 직접 목격한 세대로 대부분 한국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국민당 집권 하에 교육을 받은 전후 베이비붐 세대다. 이들의 반한정서가 가장 강한데 심지어 비이성적으로 ‘한국(인)은 무조건 반대’ 라고 할 정도다.


③ 하한세대(10세~30세): 한국드라마와 K-pop 등 유행문화를 좇으며 대체적으로 한국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들 하한세대의 한국관도 완전한 것은 아니어서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흥미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연구하지는 않는다. 또한 유행 문화에 흥미가 얼마나 지속될 지도 개인마다 다르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하한세대의 부모는 반한족이라는 사실이다. 가정에서 부모 자식간에 일치된 한국관이 없고, 심지어 한국 관련 주제에 대해 이야기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어떻게 이 세대에게 효과적으로 ‘한국 바로 알기 교육’을 제공할 것인가는 양국의 학계, 문화계, 외교계가 깊이 연구해야 할 문제다.


(3) 대만의 트라우마
전후 줄곧 경쟁관계에 있던 양국은 1980년대 초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나, 2000년대 들어 우열이 분명해졌다. 문화산업에서 뒤처진 것 외에 2004년을 기점으로 대만은 경제 분야에서도 밀려 1인당GDP가 한국에 역전 당하였다. 특히 하이테크 분야에서 과거의 경쟁자(수평분업) 관계가 수직분업의 양상으로 바뀌었다. 즉, 한국은 자체 브랜드를 육성한 반면 대만은 주문자 생산방식(OEM) 위주여서 이렇게 다른 산업구조와 발전모델로 인하여 자연히 경제 격차가 점차 커지고있다. 오늘날 한국에 대한 대만의 위상은 대만에 대한 베트남의 위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문화와 경제 분야에서 잇따라 대만인들이 좌절감을 느끼는 가운데 2010년 11월 17일에 터진 광저우 아시안게임 태권도 사태로 촉발된 반한기류는 유사이래 가장 거센 것이었다. 대만 언론에서는 사건 발발 후 며칠 동안 사건 보도에 지면을 대폭 할애하였다. 사실상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들 보도가 이를 보고 듣는 대중의 반한정서를 조장하기 위한 자작극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무위원 청즈랑(曾志朗), 위생서장(衛生署長) 양즈량(楊志良)등 일부 정부 관원들도 대중의 환심을 얻기 위해 언론에 영합하여 반한의 언행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포퓰리즘적인 작태는 마잉주(馬英九) 총통마저 이를 거들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로부터 1개월 후 ‘삼성 LED 자진 신고자 감면(리니언시) 사건’ 이 터지자 스옌샹(施顏祥) 경제부장, 궈타이밍(郭台銘) 홍하이(鴻海)그룹 회장도 ‘삼성이 상도를 어겼다’고 비난하며 반한정서를 자극하였다. 이렇게 해야 미디어에 노출될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강렬한 반한정서가 나타난 것일까? 양국은 수십년간 발전 정도가 비슷한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우열을 비교하는 심리가 있다. 여기에 대만 미디어 생태의 특수성(대부분이 외성인에 의해 경영됨)으로 대체로 우월의식을 가지고 한국을 바라봄으로써 한국에 대한 오해와 반감이 날로 커졌다. 게다가 중국의 네티즌들이 허위 사실을 유포한 것을 무책임하게 인용 보도하여 반한정서를 조장함으로써 그들의 우월의식을 만족시킨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대만 언론에서 중국 네티즌들과 함께 퍼뜨린 허위 사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한국이 한자를 발명했다.’, ‘쑨원(孫文)과 공자가 한국인이다.’, ‘단오절은 한국의 것이다.’, ‘중국의 4대 발명품이 한국에서 비롯되었다.’ ‘석가모니는 한국인이다.’, ‘이태백(李白)이 한국인이다.’, ‘농구선수 린수하오(林書豪)가 한국혈통이다.’ 등등. 나중에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속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진짜로 믿는 경우도 많다. 터무니 없는 이런 허위 사실이 오히려 끊임없이 반한정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눈에 대만의 반한 현상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만인들의 트라우마다. 많은 대만인들의 뇌리에는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생각이 남아 있으며, 자신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던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 발전에 대해 질투를 느끼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또 대만은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장기간의 외교적 고립으로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최근 한류가 전세계를 풍미하고 있고, 한국경제도 크게 발전하는 상황에서 대만은 이전에 대단할 것 없던 나라에 추월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고 이 때문에 반한정서가 생겨났다.


이 같은 반한 기류 속에서 대만정부 역시 이를 조장하고 있다. 바로 국민의 선거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혹시라도 ‘반중국(反中國)’분위기가 형성되어 집권 국민당의 선거 판세에 불리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총구를 외부로 돌려 외부의 적을 이용해 내부의 단결을 꾀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외부의 적으로 삼을 만한 나라 가운데 중국은 너무 강하고, 일본은 대만인들이 좋아하는 나라기 때문에 한국이 유일하게 이용 가능한 공격 목표가 된 것이다.


이러한 반한기류를 보면 대만 언론의 행태는 매우 비이성적이다. 그리고 그들의 작태는 단지 감정을 분출하기 위한 것으로만 여겨진다. 더욱이 이전의 뒤엉킨 애증 관계 때문에 대만인들은 맹목적으로 언론의 편파적인 보도만 믿고 한국인에 대해 더 큰 오해를 낳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많은 허위 사실들이 중국의 네티즌들에 의해 조작되어 대만으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대만 언론에서는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보도하였는데, 이 같은 행위는 한국의 언론들로부터 프로답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 중 <조선일보>의 이광회(李光會) 기자는 칼럼을 통해 대만을 성토하였다. 대만의 ‘국제고아’ 신세, 국가 정체성 결여로 대만인들은 모순적인 현실 속에서 스스로의 위상을 명확하게 정립할 수 없었다. 어떻게 대만 본연의 한국관을 수립하고 국민당이 중국으로부터 끌고 온 한국관을 포기할 것인가는 대만이 하루 빨리 풀어야 할 절박한 문제인 것 같다.



3. 문화외교를 통한 한국 바로 알기 – ‘知韓’
(1) 반한의 뿌리에서 막기
2013년 7월 6일, 주 타이베이 한국대표부의 후원으로 <지한문화협회(知韓文化協會)>에서는 ‘대만-한국 언론 고위층과 신방과 학자 좌담회’를 개최하였다. 주요 언론의 부편집장 이상 고위층과 중견 학자들이 좌담회에 참가하거나 정상기 대사와 만찬회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전례 없는 최초의 시도였다. 이번 좌담회는 기간도 반나절에 불과하고 좌담해 내용도 보도되지 않았지만 효과는 이미 나타났다.


지난 반년 동안 과장과 부추김으로 가득하던 반한 보도는 거의 사라졌다. 언론 고위층에 대한 ‘공작’함으로써 그 들이 더욱 신중하게 뉴스를 다루게 된 것이 첫 번째 효과였다. 두 번째 효과는 한국 외교관들이 대만 언론에서 조장한 반한 기류에 매우 신경을 쓰고 있으며, 뉴스를 다룰 때 좀 더 신중을 기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을 언론의 고위층과 신방과 학자들이 알았다는 점이다.


자본 규모가 영세하기 때문에 대만의 언론 매체들은 대부분 자금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저예산으로 제작할 수밖에 없고, 뉴스의 취재와 편집도 마찬가지다. 엄밀히 말해서 대만 언론이 보도하는 뉴스는 말 그대로 뉴스라기 보다는 오락성과 광고성이 가미된 형태에 가깝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종종 대만의 매체를 인포테인먼트(infor-tainment) 라고 비꼬아 말한다. 따라서 선정적인 뉴스나 가공되고 연출된 뉴스가 일상적이게 되었다.


이처럼 뉴스를 보고 듣는 대중들의 매체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낮다. A&R Edelman의 보고서(2006.10.24)에 따르면, 대만인들의 매체에 대한 신뢰도는 고작 1%로 아시아에서 최하위를 기록하였다. 대만의 언론들은 자유를 누릴 생각만 하지 책임, 특히나 사회적 책임을 지려고는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무정부주의적이고 방임주의적인 저널리즘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치적 입장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구분해보면 신문의 80%(발행부수), TV의 95%(종사인원)가 친중 성향을 띄고 있는데 이른바 통일파 언론다. 많은 언론들이 이미 베이징의 앵무새나 다름없고, 심지어 <인민일보>보다 더 <인민일보>스럽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경제적으로 그들의 시장과 명맥은 반드시 대만을 근거로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대만의 매체들이 대체로 자금력이 부족한 상황으로 볼 때, 작은 이익을 유인책으로 하여 그들을 먹여 살린다면 금세 길들여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으로 반한을 뿌리 뽑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2) ‘한국 알기知韓’는 대만에서부터
대부분의 한국인은 한류(한류, Korean Wave)라는 말이 사실 대만 신문의 영화면에 처음 등장했다가 대량으로 인용되면서 한자문화권 국가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1994년 대만의 케이블TV 시장이 자유화되면서 3개였던 채널이 60여개로(현재는 140여 개) 급증하였고, 프로그램에 대한 대량 수요로 한국 드라마가 대만에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시문에서 ‘한류(韓流)’ 라는 표현으로 한국의 대중문화를 표현하였는데 중국어의 발음이 같은 ‘한류(寒流, 즉 한국어의 한파(寒波))’에서 따 온 것이다. 대만 북부의 한파가 몰아치면 매우 춥고 습해서(대만은 실내에 난방 설비가 없다.) 북부 지방 사람들은 한파가 몰아치는 날을 싫어한다. 그래서 한류라는 말은 원래 폄하하는 의미였으나, 후에 각국에서 유행어가 되면서 나쁜 뜻은 사라져 버렸다.


구양근(具良根) 전 주 타이베이 대표는 2011년 8월 인터뷰에서 대만이 2010년 들여온 한국 드라마는 총 162부라며 한류의 발원지는 분명 대만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드라마에서 K-pop까지 첫 번째 수출국은 대만으로 중화권 시장에서의 수용도를 가늠해 본 뒤 기타 아시아 국가로 전해진다고 밝혔다. 이렇게 보면 대만은 한류라는 말을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최대의 조력자인 셈이다.


한류가 대만에서 확산되기 시작한 만큼 ‘한국 알기知韓’ 사업도 대만이 앞장설 수 있다. 필자가 최근 추진하고 있는 ‘대만본위의 한국관’ 수립하기와 마찬가지로 중화권에서 ‘한국 알기’ 사업도 발전의 여지가 무한하다.


2012년 7월 13일 필자는 서울에서 있었던 만찬회에서 다음과 같이 축사를 하였다. 한국문제 연구에 종사한지 어언 40년인데 그 동안 한국의 성장과 발전 과정을 직접 보았다. 한국은 전후 각 단계에서 20년마다 ‘경제의 기적’과 ‘정치의 기적’을 일구어내었는데, 이제 한류의 기세를 빌려 ‘문화의 기적’을 이루어가고 있다.


한국처럼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30년 만에 전쟁의 폐허와 빈곤을 딛고 일어서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교육을 보급하고, 20년마다 기적을 이루어내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지난 10년간 한류의 왕성한 발전이 한국인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높여 준 것도 극히 드문 일이다. 물론 이것은 경제성장과 민주화 덕분이며, 신라문화와 백제문화가 융합하여 찬란하고 참신한 문화를 만들어 낸 덕택이다.


이제 필자는 또 한 번의 ‘지한(知韓)의 기적’ 이 일어나길 기대하며 이를 위해서는 지금부터 기획하고 설계하여 추진해나가야 할 것이다. (후략)


(2013.12.28 한국외국어대학교 대만연구센터 주최 <대만-한국 학자 전망 간담회: 중국대륙의 신국면과 대만-한국 관계>에서 발표)



요약
1. 단교사건은 당시 외교관의 대처 비난을 면피하기 위한 언플
2. 외성인은 뼈속까지 중화사상으로 한국 멸시가 깔려있으며 미디어를 장악해 확대재생산됨
3. 일본? 대만한테 좋은 감정있고 유일한 정치적 우국
중국? 중국과 한나라라는 정치정당이 중국 적대시하길 원치않음(중화사상~한민족~)
한국이 잘나가니 배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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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톡과 릴스로 퍼뜨리고 있는 한푸공정
차이나 드레스 아님? ㄴㄴ 중국전통드레스 둔황 vs 인도 르헹가 중국이 실크로드 시대 베껴감

한푸공정 전 둔황

인도 전통복식 르헹가 맞음



https://insweet.tistory.com/492

인도네시아 문화도 훔치는 중국

왁스를 이용한 인도네시아의 아름다운 염색기법 'Batik(바틱)' 인도네시아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바틱을 신청하여 2009년 등재되었고 10월 2일을 '바틱의 날'로 지정함 옷, 지갑, 팔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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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nsweet.tistory.com/661

중국인의 영문위키 한복침략 현장

역시왜곡 한복 위키 현장 https://en.m.wikipedia.org/wiki/Hanb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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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친일하고 일본어판으로 왜곡 매국하는 일본어판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일본 수출보복 관련 일본어판 기사 칼럼의 제목 등이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는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의 공개 비판에 조선일보는 답할 게 없다고 밝혔다. 반면 중앙일보는 청와대 출입기자를 통해 항의성 유감표명을 했고 사설에서 자세한 입장을 쓸 계획이라고 답했다.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관계자는 17일 오후 △조선일보의 일어판 기사 제목이 바뀐 이유 △‘어려움에 처한 한국 상황에서 일본어판 기사와 칼럼에 이런 제목과 내용의 주장을 펴는 것이 우리 국민들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이것이 한국과 국민들을 위한 일인지 답하라’는 고민정 대변인의 비판에 견해를 묻자 문자메시지로 “답할 내용이 없다”고 했다.


조선일보 일본어판 기사제목 ‘한국은 무슨 낯짝으로 일본의 투자를 기대하나?’로 바꿔

고민정 대변인은 이날 오전 브리핑에서 조선일보의 최근 기사나 칼럼 제목이 일본어판에서 바뀌었다고 밝혔다. 고 대변인에 따르면 △조선일보의 지난 4일자 ‘일본의 한국 투자 1년새 –40%, “요즘 한국 기업과 접촉도 꺼려”’라는 기사가 → 일본어판에는 ‘한국은 무슨 낯짝으로 일본의 투자를 기대하나?’로, △5일자 ‘나는 善 상대는 惡? 외교를 도덕화하면 아무 것도 해결 못해’라는 기사가 → 일본어판에는 ‘도덕성과 선하게 이분법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로 △15일일자 ‘국채보상, 동학운동 1세기 전으로 돌아간 듯한 청와대’가 → 일본어판에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국민의 반일감정에 불을 붙일 한국 청와대’로 원 제목을 다르게 바뀌었다. 지난 5월7일자 조선일보 ‘우리는 얼마나 옹졸한가’라는 기사 제목이 → 일본어판에는 ‘한국인은 얼마나 편협한가’라는 제목으로 바꿔 게재했다고도 했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241

조선일보, 靑비판·일어판 제목 왜바꿨나에 “답할 게 없다” - 미디어오늘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일본 수출보복 관련 일본어판 기사 칼럼의 제목 등이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는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의 공개 비판에 두 신문은 오후까지 아직

www.mediatoday.co.kr




조 수석은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MBC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 8회 캡처 화면을 게시하면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일본판 기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조 수석은 “혐한(嫌韓) 일본인의 조회를 유인하고 일본 내 혐한 감정의 고조를 부추기는 이런 매국적 제목을 뽑은 사람은 누구인가? 한국 본사 소속 사람인가? 아니면 일본 온라인 공급업체 사람인가? 어느 경우건 이런 제목 뽑기를 계속 할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그는 “민정수석 이전에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 강력한 항의의 뜻을 표명한다”며 “그리고 두 신문의 책임있는 답변을 희망한다”고 했다.


해당 프로그램에 따르면 최근 한일 관계 악화와 관련한 조선일보의 기사 제목은 ‘북미 정치쇼에 들뜨고 일본의 보복에는 침묵하는 청와대(7월3일)’, ‘한국은 무슨 낯짝으로 일본에 투자를 기대하나(7월4일)’ 등이었다.

중앙일보의 기사 제목은 ‘’문재인 정권발 한일관계 파탄의 공포(4월22일)‘, ’닥치고 반일이라는 우민화 정책(5월10일)‘, ’반일은 북한만 좋고 한국엔 좋지 않다(5월10일)‘ 등이었다.
http://www.sankyung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50028

조국 “조선·중앙 일본판 제목, 매국적” - 산경일보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일본판 기사에 대해 “매국적 제목”이라며 강하게 항의했다. 조 수석은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MBC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 8회 캡처 화면을

www.sankyungilbo.com



◆친일 100년…일본은 조선일보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난 3월 25일, 57개 언론·시민사회단체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선일보 창간 100년은 청산해야 할 치욕의 100년”이라며 조선일보를 규탄했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조선일보가 일본 극우의 이익을 대변하는 반민족·친일언론이라는 여론이 높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조선일보를 어떻게 바라볼까?

위키피디아 일본어판은 “대한민국의 일간신문. 동아일보와 나란히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긴 신문사이며 발행부수는 한국 최대”라고 조선일보를 설명한다.

이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2001년 1월에 한국 신문에서 처음으로 일본어사이트를 개설해 2004년 6월 시점에서 월간 방문자수는 약 9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즉, 일본에서 ‘일본어판’을 개척한 국내 언론의 선구자가 조선일보란 얘기다.

조선일보를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태도는 어떨까? 일본 누리꾼들이 활발하게 오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위터에서 ‘朝鮮日報’로 검색해 반응을 들여다봤다. 그랬더니 조선일보가 일본에 미치는 상당한 영향력이 드러났다.




◆‘혐한 배움터’ 조선일보 일본어판
조선일보는 한국에서 낸 기사를 번역해 일본 최대 포털 야후재팬이 제공하는 야후뉴스에 송고하고 있다. 이러한 기사가 속속 퍼져나가 일본의 여론이 된다. 조선일보 일본어판은 가히 ‘일본인의 혐한 배움터’라고 할 만하다.

“윤미향은 이용수 씨에 대해서 실은 위안부가 아니었다고 언론에 암시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혹시 이 씨가 위안부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그들(정의연)은 이것을 알면서 이용해온 것이 된다. 그것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며 썼는데, 윤(미향)도 이(용수)도 부정을 하지 않았다. (조선일보의 사설이) 사실 확정.”

-5월 20일, 트위터 사용자 ‘누구라도 해설자(誰でもコメンテーター)’가 한 말.

최근 일본에서는 이른바 ‘윤미향 논란’과 관련해서도 조선일보를 인용해 “위안부는 가짜다”라는 목소리를 내는 여론이 높아졌다. 그런데 역사를 왜곡하고 일제의 전쟁범죄를 두둔하는 조선일보 일본어판의 만행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지난해 7월 17일, MBC 시사프로그램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 -일본 경제 보복, 알고 보면 한국 뉴스 때문이다?>의 보도를 주목해보자. 이 보도에서 일본의 혐한 시위자는 “어떤 (한국) 신문을 보시나요?”라는 물음에 “한국 신문 중에서는 조선일보를 신뢰한다”고 답한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니시무라 슈헤이(西村修平) ‘주권회복을 도모하는 모임’ 대표는 ‘한국 징용공(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거액 배상 판결에 일본 국민이여 한국의 공갈 사기를 허락하지 마라’를 주제로 집회를 열고 이렇게 말했다.

“(한국 신문을) 매일 보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일보 같은 매우 객관적으로 작성된 기사는 본다. ‘무조건 일본인이 싫다’ 이런 것이 아니니까 역시 조선일보 기사는 훌륭한 기사다.”

-니시무라 슈헤이 대표가 조선일보 일본어판의 5월 5일 칼럼 <‘반일’로 한국을 망쳐 일본을 돕는 ‘매국’ 문재인 정권>을 보고 한 말.

위 칼럼 내용을 보면 “안타깝게도 한국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광복을 쟁취하지 못했다. 남이 가져다준 독립이었기 때문에”라는 등의 ‘민족 비하’시각이 부각된다. 조선일보의 친일·반민족 논조가 니시무라 대표를 비롯한 일본 극우세력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분명한 방증이다.

본래 위 칼럼은 <어느 쪽이 친일이고, 무엇이 나라 망치는 매국인가>라는 제목으로 2019년 4월 26일에 한국어판에서 처음 보도됐다. 그런데 조선일보 측은 제목을 바꿔가면서까지 품을 들여 5월 5일 일본어판으로 공개한 것. 이 점을 보자면 조선일보 일본어판의 보도 행태야말로 ‘매국’ 논란에서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다.

우리는 이쯤에서 조선일보의 파급력이 과연 어디까지 미치는가를 주시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한국으로 치면 포털 ‘네이버 급’인 야후재팬이 한국 뉴스를 대거 제공하지만, 야후재팬 바깥에서도 혐한여론을 일본에 전파하는 조선일보 일본어판의 ‘위상’이 두드러진다.

앞서 일본 극우 매체 IRONNA는 2017년 4월호 기사 <조선일보 ‘한국은 모두 미쳐있다, 정상이 아니다’라는 경고는 한국 국민에게 닿을까>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한국은 모두 미쳐있다, 정상이 아니다’ 인터넷게시판으로 오인할 만한 제목이 붙은 칼럼이 1월 27일, 한국 최대 일간지 조선일보에 실렸다. 필자는 일본 특파원 경험이 있는 박정훈 논설위원. ‘국가가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라고까지 자국을 평가한 내용은 큰 반향을 불렀다.”


‘조선일보 창간, 100년’은 친일매국의 역사다. 2020년, 조선일보는 한국에서 낸 기사를 번역해 일본 최대 포털 야후재팬이 제공하는 야후뉴스에 송고하고 있다. 이러한 기사가 속속 퍼져나가 일본의 여론이 된다. 조선일보 일본어판은 가히 ‘일본 극우진영의 혐한 배움터’라고 할 만하다. 혐한 시위대부터, 전 방위상까지 조선일보를 인용해 한국을 헐뜯고 있다.



◆아베 정권의 ‘단짝’…국익·남북관계 해치는 조선일보

2019년 5월 17일, 조선일보는 <대량 살상무기로 전용 가능한데… 한국, 전략물자 불법수출 3년새 3배>라는 제목의 보도에서 “대량살상무기(WMD)로 쓰일 수 있는 우리 전략물자가 제3국을 경유해 북한이나 이란으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일본의 유력 정치인이 조선일보의 보도를 인용한 말이다.

“조선일보 기사 중에서 올해 5월이라고 보고받았습니다만, 대량 파괴에 전용 가능한 전략물자가 한국에서 위법으로 유출되는 게 급증하고 있습니다.”

-2019년 7월 15일, 일본 방위상을 지낸 오노데라 이쓰노리(小野寺五典) 자민당 의원이 후지TV와 인터뷰에서 한 말.

이에 정부는 시급히 “그런 일이 없다”고 밝혔다. 자칫 조선일보 발 가짜뉴스가 남북관계를 파탄 낼 수 있는 심각한 상황에서 청와대는 강력대응에 나섰다.

2019년 7월 17일,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조선일보가 ‘우리는 얼마나 옹졸한가’라는 칼럼을 일본어로 일본 인터넷에 게재하고 있다. 많은 일본 국민이 위의 기사 등을 통해 한국 여론을 이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바로 다음 날인 18일, 전국언론노동조합도 논평을 내 “<조선일보>가 한국 언론이길 포기했느냐”고 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조선일보는 “답할 내용이 없다”고 했다. 다만, 조선일보는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한동안 일본어판에서 문재인 정부와 관련된 일부 사설을 게재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실상 아베 정권의 기관지’로 악명 높은 극우 산케이신문이 조선일보의 편을 들고 나섰다. 산케이는 9월 8일 <조선일보 일본어판 사설 재개해야>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조선일보에 ‘혐한 사설 재개’를 강권했다. 다음은 산케이 사설의 내용이다.

“한국의 주요 신문을 일본인 독자가 일본어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논조 여하와 관계없이 바람직한 일. 이는 언론 자유에 관한 것이며 조선일보에 조속한 게재 재개를 요구한다.”

아베 정권과 밀접한 산케이가 조선일보 발 매국사태를 적극 옹호하고 나선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문득 ‘일제강점기’를 굳이 “일제통치시대”로 번역해 일본어판으로 낸 조선일보(2019년 7월 11일자 사설)의 지난날이 떠오른다.

조선일보의 시선이 반민족·친일로 쏠려있음은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누가 봐도 확실하지 않을까. 강조하건대 일본 극우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앞장세우는 조선일보의 몰지각한 매국 행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http://www.ccmessage.kr/news/articleView.html?idxno=13376

[박명훈 칼럼] 일본이 좋아하는 조선일보 일본어판 - 충청메시지

◆친일 100년…일본은 조선일보를 어떻게 생각할까?지난 3월 25일, 57개 언론·시민사회단체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선일보 창간 100년은 청산해야 할 치욕의 100년”이라며 조선일보를 규탄했다

www.ccmessage.kr



한국의 조선, 중앙, 동아, 연합은 일본어판을 갖고 있으며 공식홈페이지는 물론 일본인이 보는 포털 야후재팬에 게재하여 모든 한국정보가 누출되고 있다. 게다가 중요한 국가정보, 정치, 시사, 사회를 전부 일본인에게 무료로 공개한으로써 국가정보유출 우려는 물론이고, 가끔씩 원래했던 말과는 다른 말로 왜곡시키거나 심지어 반한을 부추기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일본내 반한정서의 중요한 출처와 근거로써 첨병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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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이중언어 말하기 대회와 달리 한중 콕집어 타다문화 배제함

근데 타이틀이 무려 한글날 기념

세종대왕님이 그러라고 훈민정음 창제하신게 아닌데



주관 서남권글로벌센터는 뭘까.

서울시 산하기관



그래서 서울시 정부포털에도 올라옴
https://global.seoul.go.kr/web/news/news/bordContDetail.do?mode=W&brd_no=2&post_no=E79A6F52D56C0134E053C0A8A02361AA

서울외국인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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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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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섬에 태초에 살던 원주민은 민남어를 사용하고 인종도 다른 여러 부족국가였다. 스페인, 네덜란드-청나라(청일전쟁 패배)-일본-중국내전 패배한 장개석이 점령하여 한족이 밀고들어온 현재에 이르게 됐다. 그래서 일본이나 국민당(장개석)이나가 돼버린것. 이 틈을 파고든게 일본의 로비에 힘입은 민진당이다. 친일이며 대만독립을 지지한다. (국민당은 하나의 중국지지) 대만은 중국에 밀려 세계적 입지가 곤궁한 상황이라 일본에 의존하여 일본덕에 대만이 발전했다고 대만 정치인이 앞장서서 말할정도.

일본의 전쟁 승전으로 얻은 첫 식민지인만큼 조선처럼 쇠말뚝을 박고 일본어 강제하는 등 민족말살적인 착취는 하지 않았다고 알고있고, 일본 이전에도 외세지배 이력이 있어 한국만큼 반감이 없는것으로 알고 있다. 대만 언론에서 잘 다루지 않는다.



그런데 중국국제방송 기사에서 대만의 일본식민지  피해를 언급한 기사가 있어 흥미롭다.

동양척식회사를 통해 토지를 수탈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대만인의 토지도 마구잡이로 빼앗았다. 결혼하며 전통 타투를 금지하고 있던걸 강제로 지우면서 얼굴에 손상을 입히기도 했다. 황국신민서사 강요, 일본기업의 착취 등 별반 다를게 없다.

https://news.cgtn.com/news/2021-09-03/Japan-s-cultural-genocide-against-Taiwan-s-indigenous-peoples-13fQIuw6ZsQ/index.html

Japan's colonial legacy in Taiwan part 3: Japan's cultural genocide against Taiwan's indigenous peoples

The DPP officials should demand Tokyo compensate their indigenous people for the land, lives and cultural heritage they lost.

news.cgtn.com


중국매체다운 호통도 잊지 않는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대만 고유의 땅에서 자행된 토착 토지 몰수, 폭력과 학살, 문화적 집단 학살 등의 명백한 악을 맹목적으로 무시합니다.

옹호론자들은 대만에서 일본의 유산을 현대화 세력으로 왜곡하고 칭찬하는 경우가 많으며, 결과적으로 민진당은 중국 본토가 큰 나쁜 늑대가 되는 편향된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이것은 대만독립주의자들이 진정으로 대만이나 원주민의 진정한 이익을 옹호하지 않는다는 전형을 보여줍니다. 민진당은 일본 식민주의의 역사적 범죄와 트라우마를 청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는커녕 사실상 식민주의를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조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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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성에서 청나라에 반대하여 마지막까지 성문을 걸어잠그고 개기다가 10일만에 양주성 안에 모든 지나족을 학살한 양주대학살. 80만명이 죽음. 참고로 남경대학살이 20만명.


만주족의 한족 대학살- 이거이 다문화의 병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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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의 한족 대학살- 이거이 다문화의 병폐다!!
반다문총장
2010. 4. 24. 22:11댓글수0공감수




청나라 때의 대표적 금서로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라는 책이 있다. 청나라 초기 청군이 중국 강남의 양주성을 함락시킨 후
1645년 4월 25일부터 5월 5일까지 열흘간 양주 주민 80만명을 학살했다. 당시 청군은 명나라 잔존 세력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양주에서 큰 피해를 입자 본보기로 양주성민을 모두 도륙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대대적인 학살을 감행했다. 이때 양주 주민
왕수초(王秀超)는 청군에게 가족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청군의 만행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 책이 ‘양주십일기’다.


일부 구절을 인용해보자. “이윽고 해가 저물자 청국 군사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는 아우성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성내 곳곳에서 불이 일어나 화염이 오르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시체는 산더미처럼 쌓이고 이날 나는 형과 형수 그리고 동생과 조카, 넷을 잃었다. 이제는 장형과 나 그리고 아내 세 사람만이 남았다.”


이 책에는 무자비한 도살은 물론 강간, 윤간과 간살(姦殺)에 대한 묘사가 무수히 많이 나온다.


양주대학살이 얼마나 심각한 사건인지 알려면 ‘난징(南京)대학살’과 비교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난징대학살은 지금도 중·일 간
극한 대립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사건으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학살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사건은 1937년 12월 13일부터
다음해 1월까지 40여일간 일본군이 중국 난징에서 약 30만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양주대학살은 불과 열흘이라는 짧은
기간에 약 80만명을 학살했으니 규모와 잔혹성 면에서 난징대학살을 훨씬 능가한다.


양주대학살은 청나라 초기의 대학살극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됐다. 청 초기 청군에 의한 대살상극을 흔히 ‘양주십일,
가정삼도(嘉定三屠)’라고 한다. 가정삼도는 다음과 같다. 1645년 청군이 남경을 점령함으로써 명나라 잔존 세력인 남명(南明)
홍광(弘光) 조정이 멸망했다. 이후 청조의 변발령에 반발해 강남 여러 곳에서 민중봉기가 발생했고 청조는 대대적인 살육을
자행했다. 지금의 상하이(上海)가 속한 가정성은 세 차례에 걸쳐 주민들이 학살을 당했다. 이것을 ‘가정삼도’라고 한다.
양주대학살을 생생하게 묘사한 ‘양주십일기’는 청나라 초기부터 금서 중의 금서로 지정됐다. 이 책은 중국 내에서는 잊혀졌으나
일본으로 흘러들어갔고 청나라 말기인 19세기 말에 일본에서 재발견된다. 당시 멸만흥한(滅滿興漢)을 꿈꾸던 한족(漢族) 지사들이
대거 일본에서 망명 중이거나 신학문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양주십일기’를 발견하고는 울분과 흥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이후 이 책은 다시 중국으로 밀반입돼 청조를 타도하기 위한 한족 지사들의 의식화 교재로 널리 활용됐다.


명말청초의 만주족에 의한 한족 대규모 학살


블로그명 :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명 말청초 대학살의 기록들

[양주십일기],[가정을유기사],[강변기략] 등의
사서에는 청군의 만행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아래에 나는 청조의 관방자료 내지 제
삼자의 서술을 토대로 이러한 만행들에 대한 보다 종합적인 자료들을 모아서 서술했다.


1.청조의 관방학살기록자료

우선, 청조는 자신이 행한 학살에 대한 예고격인 자료를 발표하였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청세조실록] 17권 순치2년 6월 병인중의 기록이다.
“ 이 포고령을 공표한 이후, 북경성 내외와 직속 각성에서의 모든 백성은 10일 안에 변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이를 위반할 시, 어떤 변명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自今布告之后,京城内外,直隶各省,限旬曰尽行剃完。若规避惜发,巧词争辩,决不轻贷”。并宣称:)



이와 동시에,
“변 발령을 지켜서 투항하는 지역은 기존의 지위와 부를 보존하게 될 것이다. 만일 반항하는 지역은 대군을 출동시켜,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고,살륙할 것이다.”
“所过州县地方,有能削发投顺,开城纳款,即与爵禄,世守富贵。如有抗拒不遵,大兵一到,玉石俱焚,尽行屠戮。




청 조는 1649년 사천성에서 또 다른 포고령을 발하였고, 그 어감은 앞서와 유사하다.
“일반 백성과 반란군이 혼재하여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성주민을 죽이거나, 혹은 남자만 죽이고, 여자는 남겼다.”(民贼相混,玉石难分。或屠全城,或屠男而留女)
청 조의 다른 관방자료인 [동화록] 5권 순치원년조에는



“본조의 명령인 변발과 만주복식을 따르지 않는 자는 용서없이 죽인다.” (不随本朝制度剃发易衣冠者,杀无赦)
진강지부의 포고에 의하면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변발을 하지 않으면 전가족을 몰살시킨다. 만일 한 가족이 변발하지 않으면 부락 전체를 몰살시킨다.”



(一 人不剃发全家斩,一家不剃全村斩고 하면서, 반항자의 머리를 잘라, 전체 백성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순 치 2년(홍광원년 1645년), 강년순무 토국옥은 “변발하고, 복장을 바꾸는 것은
새로운 왕조의 제일 중요한 정책이고, 모든 지역에 걸쳐서 실시되어야 한다. 만일 귀족, 군인,일반 백성 등이 자신의 머리를
보존하고자 하면 머리카락을 잘라야 할것이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면 머리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남산은 옮길 수 있으나,
이 명령은 바뀔 수 없다.”
(剃 发、改装是新朝第一严令,通行天下,法在必行者,不论绅士军民人等,留头不留发,留发不留头!南山可移,此令不可动!)




이 상의 청조의 공식적인 자료에서 ‘전성을 도륙한다.’,’도륙을 실시한다.’,’죽이되 용서하지 않는다’,’전가족을 몰살시킨다’(“屠全城”、“尽行屠戮”、“杀无赦”、“全家斩”、“全村斩”) 등의 흉악한 위협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하의 글에서 청조의 위협이 결코 입으로만 끝난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청군 입관 전의 대학살

우 선, 청군 입관 전, 요동지역 한족을 대상으로 한 대량학살의 기록이 초기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명9년 정월 , 누르하치는 9차 명령을 내려서, 소위 ‘무곡지인’이라 하여 곡식의 수확량이 5금두를 넘지 못하는 가난한 한족
인구 를 적으로 삼아 사로 잡아서 관내로 돌려 보내게 하였다. 최후로 정월 27일 명령을 내려, 각지에서 조사된 이 한족인구들을
모 두 살해하도록 했다. 즉, 공개적인 종족학살이었다.
천명10년 10월 3일, 누르하치는 한족을 비판하여 ‘간첩을
숨기 고,굴욕을 겪는 데 익숙하며, 반란이 끓이지 않는다’며 팔기의 각 패륵과 총병관으로 하여금 병사를 대동하여, 촌락에 한족을
만 나면, 말에서 내려 곧장 사살하도록 했다.

제삼자인 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3년 5월조에 요동인구의 참상에 대해 이렇게 써있다.

비록 청이 요양을 획득했지만, 이 지역 주민중 이들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이 변경을 넘어 왔다. 적이 크게 이르자 주민 중에는
변발을 원하지 않는 의로운 자는 거의 압록강에 투신하여 죽었다”(时奴贼既得辽阳,辽东八站军民不乐从胡者,多至江边……
其后,贼大至,义民不肯剃头者,皆投鸭水(鸭绿江)以死)

3. 청조 입관 이후의 대학살

1) 청조관방자료 및 제삼자의 자료

청조는 입관 이후, 자신들의 대학살을 적나라하게 인정하였다. 이것은 순치 7년 2월 청의대산서총독 동양량이 이르길,
“대동, 삭주, 훈원 삼성에서 이미 대학살로 인해 백성이 존재하지 않음”


조의 자료 <명청당안>에 의하면, 순치 7년 11월 21일 모든 성주민을 도륙하여 겨우 5명의 범인만이 남아서 이들을
석방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삭주지>에 따르면, “성을 도륙하여 마주치는 것은 모두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대학살은 중립적인 제삼자의 자료가 있다. 이태리소속 예수회 수도사 마르티니(1614~1661)가 기록한
<달단전기>에 따르면, “대학살은 11월 24일부터 시작하여 12월 5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여,
일률적으로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그들은 다른 말은 결코 하지 않고, 단지 ‘죽여라, 이 반란자들을 모두 죽여라’고만
외쳤다.”(두문개:<청대서인견문록>53페 이지, 중국인민대학출판사, 1885년 6월판)

네덜란드의 사신
요한 니어호프는 <중국달단대한황제조정에 대한 동인도회사 파견원의 보고>에서 “달단의 전군은 입성직후, 모든 성내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모든 병사는 파괴를 시작하고,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부녀, 아동, 노인의 울음소리는 끓이지 않았다.
11월 26일부터 12월 15일까지 각지의 거리에서 들리는 것은, ‘반란자들을 살해하라’는 소리였다. 도처에서 비명소리, 도살,
약탈이었고, 부자들은 목숨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고, 저 무도한 학살자로부터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사도림 저, 이영칭 역
< 남명사>131페이지, 상해고적출판사, 1992년 12월판)

2) 속세로부터 떨어져 있던 출가인이 기록한 대학살의 규모

<광주시종교지>에 따르면 청 순치7년(1650), 청군이 광주를 정벌 죽은 자가 70만명에 이르렀다. 교외의 오룡강에 진수화상이 사람을 고용하여 시체를 수습하여 화장하였다.
주의할 만한 것은 광주의 70만명 사망 기록은 당시 직접 시체를 수습한 스님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기록이고 사료적인 가치가 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다 가치 있는 것은 이 숫자가 지금에 광주시 대불사 홈페이지에도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출가인은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다.
청조의 대학살을 경험한 후, 그는 “모든 현에 촌락이 없고, 촌락에는 집이 없고, 집에는 사람이 없다.사람은 모두 사라졌다.”고
적었다.

관방자료에 의하면,

북경지역“눈을 들어 보면, 논과 밭이 황량하다”(위주원, 통진민고소,
황청조의, 권1),하남성 “온통 황량한 풍경이고, 사람은 극히 적다”(이인룡, 간황의관미력소, 황청조의, 권4),
호광지역”천리를 둘러 보니, 인적이 끓기었다.”(류여모, 간황흥둔소,황조경세문편권34)

청 조 최고위 통치자의 대학살 참여 증거

순치2년 11월 15일, 양주십일대학살의 실행자였던 예친왕 다석은 학살 중 미모가 빼어난 여인 103명을 획득하였다. 이들을 각각의 청조 최고위층에 헌납하였는 데,
순치제에게 10명, 섭정왕 도르곤에게 3명, 부정정친왕 치얼합랑에게 3명, 숙친왕 호격에게 2명, 영랑왕 아제격에게 1명을 바쳤다(<청초내국사원만문당안석편>중 197페이지).

3) 서로 다른 시기 인물들의 기록과 지방지의 기재

곤 산대학살 : “모두 합해 성중 인물들 중 도살당한 사람이 10명 중 4명에 달하고, 침하에 떨어져 죽은 사람이 10명 중 2명, 도망친 자는 10명 중 하나이다.”<곤신양현속수합지>권 51,

살륙이 끝나자, 성문으로 도망쳐서 물에 빠져 죽은 자, 부녀,어린이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곤산 정상에 중 료중이 부녀 천
명과 어린아이들을 숨겼으나, 수색하여 모두 죽이니, 피가 강처럼 흐르고, 폭포처럼 떨어졌다.”<연당견문잡기>

남창대학살 : “부녀는 각 팔기군으로 분배되어 졌고, 밤낮으로 병사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칼에 맞아 죽는 자, 물에 빠져 죽은 자, 자살한 자, 10명 중 7,8명이 되었다.”(서세박<강변기략>

광주대학살 :”광주에서 학살이 일어나 살아 남은 자가 드물었고, 도망친자는 바다에 빠져 죽었다.”(어재전<속명기사본말>

남웅대학살 : “집집마다 제비집이 비워졌고, 시체는 산과 같이 되었다. 죽은 자는 머리가 잘려졌고, 산자는 포로가 되었다. 피는 땅을 덮어, 어미잃은 아이는 젖을 찾았다.”(청군문서 진잔규,<웅주점가가>


정대학살: “시민들 중, 목을 매달아 죽은 자, 우물에 빠져 죽은 자, 강에 빠져 죽은 자, 피범벅이 된 자, 사지가 잘린 자,
수족이 잘리어졌으나 아직 죽지 않은 자, 뼈와 살이 찢겨진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청병은 집 위를 달려서, 통행에 제지를 받지
않았다. 성내의 난민은 거리에 돌을 쌓아 막고자 했으나, 도망칠 수 없었다. 모두 강에 투신하여 죽었고, 강물은 시체로 넘쳐
제대로 흐르지 못했다. 대낮에 길에는 강,간이 스스럼없이 행해졌고, 반항하는 자는 양손을 나무판에 못을 박아 강,간했다. 청병은
마주치는 사람마다 재물을 바치라 했고, 그 획득한 재물을 허리에 둘둘 감아, 만족하면 백성을 석방했다. 다른 병사를 만나면 또
다시 똑같은 일을 당한다. 바치는 재물이 부족하면, 즉시 칼이 휘둘려지고, 재물이 다하면, 곧 죽음을 당한다.”([가정을유기사])


주 대학살: “병사들의 학살로 인해 시체가 십여만에 이르렀다.” 게양현 관음당 해덕화상 등이 시체를 수습해서 서호산에 화장해서,
유 골을 서호남변에 묻었다. 복건성 동안현 학살 당한 자가 5만명에 달했다. 범천사 주지 석무의는 시체를 수습하여 절 동북쪽
1 리밖에 묻었다. ‘무사정’이라는 정자를 지어서 ‘만가지 선이 함께 귀의한다’고 새겼다.

상숙대학살 : “길을
걸 으면 다리 밑 하천을 말랐고, 퇴락한 집에 우물물도 말랐다. 곳곳에 시체만 쌓여 있으니, 오천여 구가 넘었다. 남녀 중 포로가
된 자는 수를 세기도 어렵다. 연못 옆 나무에는 사람 목이 걸려 있는 데, 모두 마을 주민의 몸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주대학살 : 이 일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명한 <양주십일기>이외,
< 양주성수기략>에도 이 일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 고걸의 병사가 양주에 이르렀을 때, 주민들은 호수주변으로
피난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적에게 해를 입었다. 북쪽은 경계가 엄했으니, 성밖주민들은 모두 성안이 의지할 만하다 여겨, 성안으로
몰려 들어 갔다. 들어 가지 못한 자는 그 머리를 조아려 입성을 탄원하여, 애끓는 소리가 대지를 진동시켰다.공은 마침내 문을
열 어 그들을 받아 들였다. 성이 함락당하여, 예왕의 지휘하에 학살이 행해졌고, 7일이 지나서야 마침내 멎었다. 겨우 공의 시체를
수 습했으나, 날씨가 더워서 시체가 변질되어 알아 보기 어려웠다.”([명계남략])


지에서 변발에 반항하는 자는 분산하여 학살이 행해졌다. “가을이 되어 새 명령이 발포되어, 변발하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해졌다.
명령 발표 후 마을에 변발하지 않는 자는 모두 군대로 이끌려 와, 아침에 끌려온 자는 아침에 죽고, 저녁에 끌려온 자는 저녁에
죽었다.” (<진확집>권 30)

유명한 <강음성수기>에는
“모든 성내 주민의
살해가 끝나자 칼로 성문이 봉해 졌다. 성 내에는 어떠한 것도 남지 않았다. 절의 탑에 숨어 있던 승려 등 53명만이 남았다.
성을 지키기 81일, 성내에 죽은 사람은 9만 7천명, 성밖에서 죽은 사람은 7만 5천명에 이르렀다.”

4) 청군의 성폭행([양주십일]과 [강변기략] 중 항시 볼 수 있는 자료는 열거하지 않음)


치 2년 7월 30일, 청군이 사진에 이르러 “보이는 자 마다 금은을 찾아 내어 노략질한 후 칼을 휘둘러 죽였다. 여인은 음행을
위하여 배로 보냈다.”,”주민을 마주쳐 끌고 가서, 숨긴 물건이 발견되면 배를 갈라 죽였다.”(<연당견문잡록>

순치2 년, 청군은 양주대학살을 행한 후, 무석에 이르러, “배안에는 모두 양주로부터 얻은 여인들이었다. 모두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하고, 화장을 했다.”(<명계남략>권4)


치 원년(1644) 4월, 청병이 산서성 주질현에 이르렀을 때, 생원 손문광의 처 비씨가 사로잡혔다. 부인은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내가 금은을 마른 우물에 숨겼으니, 그것을 취하자” 청병이 기뻐하여, 우물주위로 데려가 물속을 살필
때, 부인은 몸을 던져 죽었다. 금도 부인도 잃은 청병이 화가 나 큰 돌을 던져 버리고 가버렸다.(민국
<주질현지>권6)

“청의 흥안총병은 부녀를 강탈하여 수가 100명에 이르렀고, 음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큰 침상을 만들어서 처첩 십여명을 함께 침상에서 차례로 탐했다. 다시 땅에 나무 말뚝을 박아, 첩들 하나 하나씩 음문을
그 뾰족한 말뚝에 박는 놀음을 한후, 시체는 강에 버렸다.”(<평관지> 권12)

청군이 강음에서 대학살을 한 후, 청에 반항한 부녀는 강간한 후 죽였다. 지방지에 의하면 그 수는 101명에 이른다.(도광 <강음현지>권 20 <열녀>

5) 청이 노획한 한족 노예

숭정 11년 동지에서 12년 봄까지 청군이 기부에서 산동에서 획득한 한족 포로가 46만 2천 3백여명에 달한다. 숭정 15년 동지에서 16년 여름까지 청군이 획득한 포로는 36만 9천명에 달한다.(<청태종실록>

청 군은 입관이후 계속해서 백성들을 사로 잡아 포로로 삼았다. 순치 2년 8월 병부에 명하길,'포로들을, 이전 예에 따라 성을 공략하다 부상당한 병사들에게 하사하라'고 했다.
(<청세조실록>


족 노예들은 주인의 학대를 받았을 경우, 대량으로 자살하였다. 강희 초년, “팔기병 집안에서 매년 자살하는 자가 2천명이
넘었다.”([청사고]),이 를 보건대, 청군의 입관이후,몇 십년간 자살한 한족의 수는 10만명을 넘었으리라 본다.

만주
인의 혹독한 학대로 인하여, 대량의 한족 노예는 도망쳤다. “수개월 동안, 수만명의 노예가 도망쳤다.”<청세조실록>,
청의 통치자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1626년 <도인법>을 제정, “도망친 노예를 은닉하면 참수형에 처한다. 그
이 웃의 10집, 100집, 지방관도 처벌을 받을 것이다.” 이로 인해, 청조에 투항한 유명한 배신자인 정남왕 화종명조차, 도망친
한 족 노예를 숨긴 이유로 강제로 자살했다.

4.대학살의 규모에 대해 추정

필자가 명청교체기 인구변천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명대 중국 인구는 최후로 행해진 공식 통계에 의하면, 51,655,459명이고, 조사시기는 명 광종 태창 원년이었다. (명 가종실록 4권)

청조 최초의 전국적인 인구조사는 청 세조 순치제 8년에 실시되었는 데, 이 때 인구수는 10,633,326명이었다. (청 세조실록 61)

청조가 전국을 완전히 통제한 청 성조 강희제 21년 (1682년, 입관후 48년) 전국 인구는 19,432,753명이었다. 이는 명 광종 태창 원년 인구의 단지 36%이다.


상의 인구 숫자는 당연히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당시 인구에 따라 세금을 납부해야 했으므로 많은 인구수가 조사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명대 실제 인구를 대략 1억에서 2억 사이로 추정한다. 비록 청조에서도 이러한 인구은닉현상이 있었지만,
청군의 입관이후, 인구 감소는 최소로 잡아도 5천만이상이다. 48년 동안 새로운 세대들이 계속 태어난 것을 고려하면, 청조 입관
직후 수년 간 인구 감소는 5천만명을 휠씬 상회할 것이다. 즉, 인구감소가 1억을 초과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수천만명이 청군의 입관 후에 학살당했다고 추정해도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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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의 난(永嘉之亂)은 중국 서진 말기에, 회제(懐帝)의 연호였던 영가(永嘉 307년~312년) 때 서진의 수도를 흉노족이 차지한 사건.

산서성을 중심을 다스리고 있던 흉노왕 유연은 팔왕의 난 때, 성도왕 사마영이 유연에게 공물을 주고 도움을 요청하여 사마영에게 군사 원조를 해주고 있었으나 304년 사마영을 공격한 후 좌국성(左國城;현재 산시성 리스현(山西省 離石縣)을 본거지로 삼고, 대선우(大單于)의 지위에 앉았다. 또한 당시 한족들은 유연을 한나라 성씨인 유씨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유연은 흉노족 앞에서는 대선우 한족들 앞에서는 한왕(漢王)으로 칭해 한왕으로 불렸다. (이 나라는 후에 조(趙)로 이름을 바꾼다) 그 후 산시성 남부로 세력을 확장해, 갈족의 석륵과 함께 허베이성과 산둥성도 정복하였고 많은 한족들을 노예로 삼거나 학살하였다.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란 1126년 송나라가 여진족의 금나라에 패하고, 중국 사상 정치적 중심지였던 화북을 잃어버리며, 금 태종에 의해 황제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에 사로잡힌 사건을 말한다. 정강(靖康)은 당시 북송의 연호다. 금 태종은 휘종과 흠종의 황후와 모친들 그리고 후궁들을 금나라 기방으로 강제로 보냈고 한족들은 휘종과 흠종의 부인과 모친들을 기생이 되어 여진족들에게 희롱당하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


토목의 변(土木之變) 또는 토목보의 변(土木堡之變)은 명나라 정통제 14년(1449년)에 발생한 명나라와 몽골 부족을 통일한 되르벤 오이라트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영종은 친정을 하다가 오이라트의 포로로 잡혀 중국 역사상 야전에서 포로로 잡힌 유일한 황제로 기록되었다. 토목보는 현재 장가구 화이라이 현 토목진이다.


경술의 변(庚戌之變)은 명 세종(世宗) 가정(嘉靖) 29년(1550) 6월, 알탄 칸이 이끄는 우익몽골(右翼蒙古)이 명으로 진공한 사건이다. 사건은 세종 가정제(嘉靖帝)가 몽골과의 무역을 거절하면서, 오르도스 일대에 분봉되었던 몽골 투메드부(土默特部) 수령이자 다얀 칸(達延汗)의 자손인 알탄 칸(俺答汗)이 전쟁을 일으켰다. 알탄 칸은 명나라에 말 무역과 와시(교역 시장)을 열어줄 것을 여러 번 명나라에 요구했지만, 가정제는 이를 거절했다. 이 전쟁에서 대동(大同)에서 명나라 수도 북경(北京)까지 곧바로 쳐들어오면서 주변의 것들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이때가 경술년(庚戌年)에 해당하므로 '경술지변(庚戌之變)'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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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진짜였다.
https://youtu.be/luOvAYz8eiE

말끝마다 올리는 서울사투리.
90년대에는 확실히 그랬었다.
이래서 '서울말=끝음올리기'란 공식이 세워졌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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