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 일왕이자 A급 전범이 89년 1월 사망했다.
당시 미국에선 조지 부시(아빠) 대통령
중국에선 젠지첸 외교부장(장관)


한국에선 강영훈 총리를 필두로 조문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으며 노태우 전대통령은 조전을 보냈다.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는 한국에 있는 일본대사관에 마련된 빈소에 조문했다.


김재순 당시 국회의장과 강영훈 당시 국무총리도 조문했다(강총리는 일본대사관조문+일본 현지조문).


한국인 200명이 조문했으나 일본대사관은 명단을 밝히지 않았다. (기사)


일본 정계와의 인연
김대중은 1971년 5월 24일 14톤트럭 충돌사고로 양팔 정맥과 관절 부상을 당했다. 암살시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껴 72년 10월 11일 일본에서 치료를 받다가  10월 17일 박정희의 비상계엄령과 10월유신선포에 일본으로 망명을 결심한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얘기고 사실 일본은 지금도 난민을 안받아주는 나라가 일본이다. 1965년 국교정상화가 됐다곤 하나 비자받기도 어려운 시절에 일본이 망명을 받아준다? 매우 이례적인일이다. 비자 받기에도 보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무려 당시 일본 외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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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中拉致事件(青木 徹郎)2003年5月
身元保証人は外相?
北朝鮮による日本人拉致事件が新聞・テレビで大きなニュースとなったが、拉致事件といえば、いまから30年前、韓国の公安当局が、当時、韓国の反政府・民主化運動のリーダー格だった金大中前大統領を日本国内から連れ去った事件と、この事件に関連して、記事には書けなかった1つの、“事実?”を思い起こした。

金大中事件は、韓国の公権力により、国家の主権が侵害されるという、日本にとって極めて重大で深刻な問題であった。しかし、日本の捜査当局が、拉致事件に在日韓国大使館の一等書記官が関与していたことを突き止めたが、日韓両国政府は、事件発生後から3ヵ月後、日韓首脳会談によって、事件の真相解明を棚上げにして政治的決着を図った。

当時のことなので、いつごろのことか、記憶はさだかではないが、この事件に関連して、“重大な事実?”を知った。

日本滞在中の金大中の身元保証人に、当時の大平外相がなっていたという話を、懇意にしていた警察庁幹部から聞かされた。もし、“事実”だとすれば、韓国における反政府運動の首謀者の身元保証人を、こともあろうに日本の外務省首脳が引き受けていたことになる。

この“事実?”が表に出れば、金大中事件の真相解明はもとより、日韓関係そのものにも、重大な影響を及ぼすものと思った。そのため、自分なりに判断して、この“事実?”を報道するのを断念した。心のうちに秘め、ほとぼりがさめたら関係者に確認することにした。

事件前の韓国の政治情勢はどうだったろう。61年5月将校を率いてクーデターに成功した朴正熙は、62年3月に大統領権限代行になり、63年10月の選挙で、尹候補を小差で破り、第5代大統領になっていた。長期化する軍事政権に対する反政府・民主化運動が、国民の間で高まっていた。

こうした中で、71年に大統領選挙が行われ、朴大統領と、野党「新民党」のスポークスマンとして金泳三らと共に活躍していた金大中の2人が争った。選挙の結果は、634万票対540万票と約90数万票差で、現職の朴大統領が勝利をおさめた。しかし、金大中候補の大統領選の善戦は、反政府・民主化運動を勢いづかせた。

その直後、金大中が交通事故で重傷を負う事故が起こった。朴大統領の強力な政敵となった金大中を抹殺するため、KCIA(韓国中央情報部)が企てたという“陰謀説”もあった。金大中は、このケガの後遺症の治療や海外の同胞たちの支援を受けるため、たびたび米国や日本を訪れ、反政府・民主化運動を続けていた。

90万という票差に危機感をつのらせた朴政権は、政敵・金大中の反政府運動を抑圧するため、彼の海外滞在中の72年10月に「非常戒厳令」を発令した。このため金大中は、国外へ亡命したも同然となり、とても韓国に戻れる状況ではなくなった。

この翌年、金大中事件が起こった。当時の報道をもとに事件の概要をまとめた。
김대중 납치사건(아오키 테츠로 기자) 2003년 5월
신원 보증인은 외무상?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건이 신문·텔레비전에서 큰 뉴스가 되었지만, 납치 사건이라고 하면, 지금부터 30년전, 한국의 공안 당국이, 당시, 한국의 반정부·민주화 운동의 리더격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일본 국내에서 떠난 사건과 이 사건과 관련해 기사에는 쓸 수 없었던 하나의 ‘사실?’을 상기시켰다.

김대중 사건은 한국의 공권력에 의해 국가의 주권이 침해된다는 일본에 있어서 매우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일본 수사당국이 납치사건에 재일한국대사관의 일등서기관이 관여했던 것을 밝혀냈지만, 한일 양국 정부는 사건 발생 후 3개월 후 한일 정상회담 에 의해 사건의 진상해명을 선반으로 하여 정치적 결착을 도모했다.

당시의 일이기 때문에, 언제쯤인지, 기억은 속담이 아니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 “중대한 사실?”을 알게된다.

일본 체류 중인 김대중의 신원보증인에게 당시 오히라 외무상이 됐다는 이야기를 긴히 하고 있던 경찰청 간부로부터 들려졌다. 만약 '사실'이라고 하면 한국에서의 반정부운동의 주모자의 신원보증인을, 일어날 정도로 일본의 외무성 정상이 맡고 있던 것이 된다.
☞차명 지인 아무나도 아니고 외무상(외무부장관) 실명으로 신원보증인 서줌

이 ‘사실?’이 표에 나오면 김대중 사건의 진상해명은 물론 한일관계 자체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했다. 그 때문에, 나름대로 판단하고, 이 “사실?”을 보도하는 것을 단념했다. 마음 속에 숨기고 은근하게 멈추면 관계자에게 확인하기로 했다.

사건 전 한국의 정치 정세는 어땠을까. 61년 5월 장교를 이끌고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62년 3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63년 10월 선거에서 윤 후보를 소차로 꺾고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 . 장기화하는 군사정권에 대한 반정부·민주화운동이 국민들 사이에서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71년 대선이 열렸고 박 대통령과 야당 '신민당'의 대변인으로 김영삼 등과 함께 활약하던 김대중 두 사람이 싸웠다. 선거 결과는 634만표 대 540만표와 약 90수만 표 차이로 현직 박 대통령이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김대중 후보 대통령선의 선전은 반정부·민주화운동을 추진했다.

그 직후 김대중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는 사고가 일어났다. 박 대통령의 강력한 정적이 된 김대중을 말살하기 위해 KCIA(한국중앙정보부)가 기획했다는 ‘음모설’도 있었다. 김대중은 이 부상 후유증 치료나 해외 동포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종종 미국과 일본을 찾아 반정부·민주화 운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90만이라는 표차에 위기감을 불어넣은 박 정권은 정적 김대중의 반정부 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그의 해외 체류 중인 72년 10월 '비상계엄령'을 발령했다. 이 때문에 김대중은 국외로 망명한 것도 당연해져서 심각하게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됐다.

이 다음해 김대중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보도를 바탕으로 사건의 개요를 정리했다.

                                                ◇
73年7月25日から、日本に滞在してた金大中が、8月8日の白昼、宿泊中の東京・千代田区の「ホテル・グランドパレス」から、複数の韓国人により拉致された。その後、行方不明となり、6日後の8月13日になって、韓国ソウル市内にある自宅に、目隠しをされ、傷だらけの姿であらわれた。この事件の全貌については、その後、韓国の有力紙が「KCIA」の“極秘資料”を入手したとして明らかにしている。この他にも様々な報道がされてきた。

当時の日本政府は、田中首相、大平外相の時代であった。後に発刊された『大平回想録』によれば、日米首脳会談から帰国したばかりの大平外相は、静養先の箱根で事件発生を知らされた。外相は「この事件は、日本の主権に対する侵害が絡む複雑かつ深刻な問題」と認識していたという。

金大中本人は、当時の会見で「ホテルの廊下で麻酔薬をかがされ連れ出され、自動車で大阪らしいところに運ばれた。その後大きな船で韓国に連れてこられた」と拉致された模様を明らかにしている。

この年の9月になって、日本の捜査当局は、現場に残された指紋などから在日韓国大使館の金東雲一等書記官が、事件に関与していた事実を突き止め、韓国側に任意出頭を求めたが、事実上拒否された。また本人も、すでに日本にいなかった。その後も、韓国政府は「金書記官の帰国を認めたが、事件には無関係」との態度を貫き通した。このため、事実関係をめぐる両国の主張は、平行線をたどっていた。

日韓両国には、暗い過去の歴史があり、また国交が正常化されたとはいえ、当時の両国関係は、必ずしも良好なものではなかった。

このままこう着状態が続けば、両国関係は抜き差しならない外交的亀裂を生じる可能性もあった。事件発生直後は、極力政治レベルのものにせず、この問題に対処していた大平外相も「お互い独立国家として、長期の友好関係を考慮する必要がある」として、事態打開のために、高度の政治判断による決着に傾いたといわれる。

73년 7월 25일부터 일본에 체재했던 김대중이 8월 8일 백일, 숙박중인 도쿄 치요다구의 '호텔 그랜드 팰리스'에서 여러 한국인들에 의해 납치됐다. 그 후 행방불명이 되어 6일 후인 8월 13일이 되어 한국 서울 시내에 있는 자택에 눈가리개를 치고 상처 투성이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의 전모에 대해서는 이후 한국의 유력지가 'KCIA'의 '극비자료'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다양한 보도가 되어 왔다.

당시 일본 정부는 다나카 총리, 오히라 외무상이던 시절이었다. 이후 발간된 '오히라 회상록'에 따르면 미일 정상회담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된 오히라 외무상은 정양처의 하코네에서 사건 발생을 알게됐다. 외무상은 “이 사건은 일본의 주권에 대한 침해가 얽힌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했다고 한다.
☞일본내 김대중 납치 소식을 현지에서 전해듣고 일본 주권 침해의 심각성으로 인식했다는 오히라 외무상

김대중 본인은 당시 회견에서 "호텔 복도에서 마취약을 씌워 데리고 나와 자동차로 오사카다운 곳으로 옮겨졌다. 그 후 큰 배로 한국으로 데려왔다"고 납치된 상황을 밝혔다.

올해 9월이 되어 일본 수사당국은 현장에 남겨진 지문 등에서 재일한국대사관 김동운 일등서기관이 사건에 관여했던 사실을 밝혀 한국 측에 임의 출두를 요구했지만, 사실상 거부되었다. 또 본인도 이미 일본에 없었다. 그 후에도 한국 정부는 "김서기관의 귀국을 인정했지만 사건에는 무관하다"는 태도를 취했다. 이 때문에 사실관계를 둘러싼 양국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한일 양국에는 어두운 과거의 역사가 있어, 또 국교가 정상화되었다고는 해도, 당시의 양국 관계는, 반드시 양호한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이렇게 착상이 계속되면 양국 관계는 외교적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다. 사건 발생 직후에는 최대 정치 수준의 것이 아니라 이 문제에 대처하고 있던 오히라 외무상도 “서로 독립국가로서 장기적 우호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사태 타개를 위해 고도의 정치 판단에 의한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얼마나 사건을 신경 썼는지 알 수 있음.

                                                    ◇
ところで、当時、日韓両国は入国査証(ビザ)を取得するためには、入国先の身元保証人が必要であった。金大中の場合、この身元個人名かどうか不明だが、当時の大平外相のサインがあったとのことだ。

朴大統領にとっては、金大中が最大の政敵であり、反朴運動の首謀者でもあって、“政治犯”も同然であった。こうした金大中の日本入国に際し、日本の外務省首脳が、身元保証人を引き受けていたとなれば、韓国側は、国家間の信義に反する重大な外交問題だとして、日本政府に事実関係の究明を迫ることは必至だろう。となれば、金大中事件の真相究明どころか、政治決着もおぼつかなくなる。さらには、日韓関係そのものが、重大な局面を迎えたことだろう。

金大中拉致事件に、韓国の公安当局者が関与したことは、日本側の捜査で明白である。最終的には、事実関係をうやむやのまま、“政治決着”を図ったことは、大平外相にとっても苦渋の選択であったに違いない。

こうした背景に、“身元保証人問題”が事実だとすれば、何らかの影響があったのではないか。

この“事実”関係について、ほとぼりがさめたら、当事者に確認するとともに、引き受けたわけをただしたいと思っていたが、日常の取材活動に追われて、確認できないままに、当事者もすでに他界されており、真相は“藪の中”……。

그런데 당시 한일 양국은 입국사증(비자)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입국처의 신원보증인이 필요했다. 김대중의 경우 이 신원 개인명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당시 오히라 외무상의 사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에게는 김대중이 가장 큰 정적이고 반대운동의 주모자이기도 했고 ‘정치범’도 맞았다. 이러한 김대중의 일본 입국에 즈음해, 일본의 외무성 정상이 신원 보증인을 맡고 있었다면, 한국측은, 국가간의 신의에 반하는 중대한 외교 문제라고 하고, 일본 정부에 사실관계의 규명을 강요한다 것은 필연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김대중 사건의 진상 규명은 커녕 정치결착도 어지러워진다. 게다가 한일관계 자체가 중대한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외교문제로 비화될경우 위험부담이 상당했음에도 보증서준 오히라.

김대중 납치사건에 한국 공안당국자가 관여한 것은 일본 측 수사에서 분명하다. 최종적으로는 사실관계를 어지럽히지 않고 '정치결착'을 도모한 것은 오히라 외무상에게도 힘든 선택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배경에, “신원 보증인 문제”가 사실이라고 하면, 어떠한 영향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사실”관계에 대해서, 시간이 흐르면, 당사자에게 확인하는 것을 비롯해 맡은바 소임을 다하고 싶었지만, 일상의 취재 활동에 쫓기다보니 확인 못한채로, 당사자도 벌써 타계하여, 진상은 “안개 속”…
https://www.jnpc.or.jp/journal/interviews/22382

金大中拉致事件 | 取材ノート | 日本記者クラブ  JapanNationalPressClub (JNPC)

北朝鮮による日本人拉致事件が新聞・テレビで大きなニュースとなったが、拉致事件といえば、いまから30年前、韓国の公安当局が、当時、韓国の反政府・民主化運動のリーダー格だった

www.jnpc.or.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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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에서 납치를 당해 바다 한가운데 밧줄과 돌로 수장될 뻔한 위기를 일본의 해상자위대가 추격해와 구사일생으로 살고 납치괴한들은 작전을 바꿔 자택근방 뒷골목에 풀어주었다.


오히라 뿐만 아니라 일본 고위층과 인연이 있는것으로 보이고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 생명의 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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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中大統領を大事にした福田赳夫首相
김대중 대통령을 아꼈던 후쿠다 타케오 전총리

――金大中(元大統領)と福田赳夫を会わせる機会をつくったと、あるところに出ていましたが。
김대중(전 대통령)과 후쿠다 타케오를 만날 기회를 만들었다고, 어디서 그렇게 나왔던데요.

彼が何日か予定に従って行動した後、再び私のところに来まして、「私が日本に来たところで、誰か将来つきあうことによって韓国のために、私のためになる人はいないかね」と言うので、「福田赳夫さんだったらどうかね」と言ったら、「そんな人に会えるの?」というんです。「連絡してみる」と。それで福田赳夫先生に紹介したら、こいつが口が上手でしょう。べらべら喋って、あのときはあんまり反政府で固まっていない、生ぬるい時代ですから内容は激しくはなかったけれども、「韓国は38度線を守っているので、日本は韓国に援助をするのはあたりまえ中のあたりまえだ」と、こんな誰も言う話をまたするから福田先生が聞き飽きちゃって、「ああ、よくわかりました。ところであなた、いまは幾つ?」「39」とか何とか言ったら、「いやあ、お兄さん」と。突然お兄さんと呼ばれて金大中はびっくりして、「何がお兄さんです」と。私もびっくりしたら、「私は明治39年生まれだけれども、あれ以来年をとっていないから、お兄さん。39だから自分より1つ上だ」というので、「1つ上のお兄さん」と言って、金大中には非常に印象深く植えつけた会合でした。僕は、「おまえ、38度線はもうみんな聞き飽きているよ。あれはもう二度と言うな」と言ったら、「いや、私は韓国人として言うのはそれしかないじゃないか」というのが、最初の頃でした。
그가 며칠 예정대로 일정을 지낸 뒤 다시 내게 와서 "내가 일본에 왔을 때, 누군가 장차 오래 사귀면서 한국을 위해, 나를 위한 사람 누구 없을까"라고 말하기에, 「후쿠다 타케오씨라면 어떨까」라고 말하자,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연락해 볼게」라고. 그래서 후쿠다 타케오 선생님에게 소개하니, 이 녀석이 언변이 능하지요. 쏼라쏼라 말하고, 그 때는 그다지 반정부에 굳어지지 않은, 초반이던 시절이기 때문에 내용은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은 38도선을 지키고 있으므로, 일본은 한국에 원조를 하는 것은 당연 중의 당연하다"라고, 이런 누구한테나 말하던 이야기를 또 하니깐 후쿠다 선생이 듣다가 질리게 되어, "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당신, 지금은 몇 살?" "39"인가 뭐라고 하니 "이야, 형"이라하니 갑자기 형이라고 불린 김대중은 깜짝 놀라서 "뭐가 형입니까"라고. 나도 깜짝 놀랐는데, "나는 메이지 39년생이지만, 그 이후로 나이가 안먹어서, 형. 39면 1살위다."이라고 말해 김대중에게는 매우 인상 깊게 남은 회합이었습니다. 저는 "너, 38도선얘긴 이제 다들 질렸어. 두번 다시 하지마"라고 말하자 "아니, 내가 한국인으로서 할 말은 그것 밖에 없지않은가"라고 말했던 초기 시절이었습니다.

それ以後、金大中が野党党首になったときに福田先生が日韓協力委員会の委員長として行ったときに、金大中が「先生、あのとき以来ですね」と言ったもので、福田は非常に気持ちがよかったらしい。みんなに「金大中という野党のやつが、昔からの深い友情があるようにしてくれた」と。僕にも、「崔さん、あのとき会っといてよかったよな」と言っていました。
그 후 김대중이 야당당수가 되었을 때, 후쿠다 선생님이 한일협력위원회의 위원장으로 갔을 때 김대중이 “선생님, 그때 이래군요”라고 말한 것으로 후쿠다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고한다. 모두에게 "김대중이라는 야당의 녀석이 옛날부터 깊은 우정을 잇도록 해주었다"고. 나한테도, 「최씨, 그 때 만나가지고 다행이야」라고 말하였습니다.

――福田さんが?
후쿠다 씨가?
崔 はい、とても嬉しかったらしい。
최   예 엄청 기뻤던 모양입니다

https://toyokeizai.net/articles/-/589804?page=2

戦後日韓関係を舞台裏で支えた韓国知識人の独白

――金大中(元大統領)と福田赳夫を会わせる機会をつくったと、あるところに出ていましたが。崔 金大中君が国会議員になって初めて日本に来たとき、私は既に狸穴(編集者注:東京都

toyokeiza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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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김대중 전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코이즈미 전총리, 아소 타로 전총리가  분향소에 조문한 바 있다.

http://m.jpnews.kr/1383

[JPNews 일본이 보인다! 일본뉴스포털!] 도쿄에 마련된 김대중 전대통령 분향소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하기 위한 조문소 및 분향소가 일본각지에 마련됐다.  도쿄의 경우 주일본국한국대사관(이하 `주일대사관`)을 비롯해 신주쿠 코리아타운의 재일본한국인연

m.jpnews.kr


고이즈미 전총리, 아소 다로 총리도 조문해
먼저 도쿄 미나토구(港区)의 주일대사관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장으로 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서거 다음날 8월 19일 오전부터 분향소 운영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대사관 1층 접견실 내에 임시로 만들어진 분향소에는 평일인 탓에 찾아오는 사람은 적어 보였다. 하지만 관계자에 따르면 "대사관 주변의 한국기업 주재원이나 회사원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분향소를 찾고 있다"고 한다.

또한 유학생들과 가족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 주말이 되면 많은 한국인들이 찾을 것을 예상, 분향소가 운영되는 23일 18시까지는 직원들이 조를 짜 특별 근무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분향소는 한국을 대표하는 대사관답게 많은 외국공관과 일본 정치인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분향소에는 현재 고이즈미 전 총리를 비롯, 내각 대신들의 추모행렬은 물론, 21일 오후 8시 30분경에는 아소 다로 총리도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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