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는 미디어에서 물정모르고 촌스럽게 비추어진다. 지금보다 사투리에 아무 관심없었을땐 그저 발음도 어휘도 모든것이 촌스럽게 여겼었다.
그런 사투리의 편견을 깬 일화중 하나가 식겁하다. 많이들 알지만 굳이 바꾼다면 깜짝 놀라 철렁할때 쓰는 말. 말그대로 식겁하다 食怯+하다인데 안동지역에서 퍼졌다는 설이 있다. 신라의 서울이었던 경주나, 현재 대도시인 대구나 부산도 아닌 어째서 안동일까.

그것은 바로 퇴계학파이자 남인으로서 영남사림의 정치1번지였다. 따라서 일상회화에서도 한자사용이 빈번하였다는 설이 설득력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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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놀랍다-놀라워
지겹다-지겨워
즐겁다-즐거워
고깝다-고까워
고맙다-고마워
버겁다-버거워
살갑다-살가워
부럽다-부러워
부끄럽다-부끄러워
밉다-미워
무섭다-무서워
미덥다-미더워
껄끄럽다-껄끄러워
그립다-그리워

상태
뜨겁다-뜨거워
차갑다-차가워
덥다-더워
춥다-추워
눕다-누워
더럽다-더러워
무겁다-무거워
가볍다-가벼워
가렵다-가려워
마렵다-마려워
촌스럽다-촌스러워
헐겁다-헐거워
가엽다-가여워
귀엽다-귀여워
곱다-고워-고와
추접스럽다-x-추저워(경상도,추저버)


표준어-~워 형용사-사투리-~워형용사
싱겁다-싱거워
맵다-매워
시다-x-시그럽다/새그럽다-시그러버/새그러버
짜다-x-짜갑다(경상도,강원도)-짜가버
쓰다-x-씹다(경상도)/쓰겁다(강원도/함경도)-씨버(경상도)
*달다-x : 달다는 '달가워'가 관용적으로 '기꺼이, 기쁘게'란 의미로 쓰이면서 자연스럽게 해당 의미로의 변형은 본의미로 쓰지 않고 달달하다, 달달구리 등으로 변형 대체된듯.

단순 사투리인줄 알았던 ~워 형용사의 경상도 사투리가 고대5국어 ~ᄫㅓ가 중부지방은 ~워로 변형된 반면, 경상도는 ~ㅂ버로 변형되면서 'ᄫ'이 보존되었다고 한다. 강원도 사투리에도 ~ㅂ다으로 보존해 있는 것으로 보면 잃어버린 훈민정음 순경음 비읍ㅸ을 되찾을 수 있을 지도.


https://m.blog.daum.net/odu1893/214

<한글나라 >찌아찌아족 순경음 'ㅸ' 발음은 경상도 사투리와 친척일까?

- 오두의 한글나라(2010년 564돌 한글날 기념 칼럼) - 찌아찌아족 순경음 'ㅸ' 발음은 경상도 사투리와 친척일까? - 순경음 비읍 음가를 가지는 경상도 사투리 말들 표준어에 포함시켜야! - *찌아찌

blog.daum.net


표준말에서는 순경음 ‘ㅸ' 은 ㅇ을 만나거나 모음과 모음 사이에서 ㅂ 발음이 탈락되어 표기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덥다 > 더워, 더우니, 더워라
글발 > 글발(ㅸ) >글왈 >글월
알밤 > 알밤(ㅸ) > 아람
쉽 + 이> 쉬ㅸㅣ > 수ㅸㅣ> 수이, 쉬
곱 + 이> 고ㅸㅣ > 고이

이러한 'ㅂ'이 'ㅇ'으로 대체되어 생략되는 것은 유럽 지역에서 반모음으로 취급되는 'W'가 자주 'ㅂ'과 'ㅇ'으로 교차되어 발음되는 것과 유사한 현상이다. 순경음 ‘ㅸ'은 동사나 형용사에서 ‘w+아, w+이, w+어, w+이’의 결합하여 모음화 되는 것이다.

(중략)
경상도 사람들은 지금도 '순경음 'ㅸ' 발음을 한다.

예를 들어 경상도 사람들은 '덥다'에서 나온 '더워라'를 '더버라'라고 발음하고 '반갑다'에서 나온 '반가와'를 '반가바'로 표현한다. 찌아찌아족이 순경음 'ㅸ' 을 사용하기 전에 이미 신라에서 순경음 'ㅸ' 발음이 유래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경음 ‘ㅸ’은 오늘날까지 경상도 지방에서 그 음가가 남아 있어 경상도 사투리에는 순경음 발음을 사용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경상도의 순경음 ‘ㅸ' 발음의 사용은 신라시대 말이 중세 국어의 바탕이 되면서도 수도를 개성과 한양으로 하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사투리'로 취급되었다.

순경음(脣輕音) 'ㅸ'은 신라시대에서 기원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한 15세기의 순경음 발달의 근원이라는 학설은 그래서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말의 순경음 ㅸ이 이응으로 변이되는 과정은 일본어의 바(ば)가 하(は)를 거쳐 와(わ)로 발음되는 현상에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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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인 의미로 무언가로 더러움/물기를 쓸어내거나 훔쳐내는 행위를 일컫는다. 서울경기에선 씻다는 의미로 쓰이나 남부지방에선 몸을 씻다는 의미로 쓰이진 않는다.

워낙 '발닦고 잠이나 자'라는 표현을 화자들이 많이 쓰다보니 어떤의미인지 알지만, 일상적으로 손을 씻는다는 의미로 '손닦다'는 쓰지 않는다.


문법적으로 씻다=/=닦다
https://www.korean.go.kr/front/onlineQna/onlineQnaView.do?mn_id=216&qna_seq=125471

국립국어원

축소 확대 온라인가나다 상세보기 [재질문] 닦다와 씻다 작성자 김훈범 등록일 2017. 9. 7. 조회수 970 그렇다면 '발 닦고 잠이나 자라' 라는 표현은 잘 못 된 것인가요? ' '발 닦고 잠이나 자라'라

www.korean.go.kr

사전적인 뜻풀이에 따른다면 '발을 씻다'의 의미로 '발 닦다'라는 표현을 쓸 수는 없습니다. 이전 답변에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거죽의 물기를 훔치다'의 의미라면 "(수건 등으로) 발을 닦고 잠이나 자라."라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서울경기 방언이라 볼수있음. 개인적으로 표준어인줄 알았는데 매우 충격적. 확실히 언어의 간섭이 적을수록 잘 보존돼있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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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witter.com/Rieuxx/status/1539807700573224960

트위터에서 즐기는 리외

“맵찔이라고 무시하는 문화도 밥맛 떨어짐. 매울 필요없는 음식까지 맵게 더맵게!를 외치는 쪽이 오히려 맵치광이라고 불려야 마땅함.”

twitter.com


맵찔이라고 무시하는 문화도 밥맛 떨어짐.
매울 필요없는 음식까지 맵게 더맵게!를 외치는 쪽이 오히려 맵치광이라고 불려야 마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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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는 일본어에서 해당 어휘를 수입했다
등교할 때 登은 등산할 때 등이라서 학교가 보통 산깎아서 만든 학교가 많아서일까? 일본유래라 아닐지도
하교 역시 산을 내려갈 때 하산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 옛날에 배움이 경지에 이르렀으면 하산하라고 한것과 같은 관념에서 나온 단어인걸까

직장에 가고 오는 것은 출퇴근이라고 하는데 출석의 반대말은 결석이고 결근에 대응하며, 퇴근에 대응되는 퇴석이라는 말은 학교에서 쓰는 말이 아니라 참석한 행사, 지정된 자리를 떴다는 의미다. 퇴학은 학교를 아예 중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등교는 上学 하교는 下学 출근은 上班 퇴근은 下班. 체계가 일관적이다. 참고로 수업시작은 上课 수업종료는 下课.
결석은 缺席 출석하다는 出席으로 같은 한자를 쓰지만 출석을 부르다는 点名 이름에 점을찍다, 카드로 출결관리하는 곳은 打卡 카드찍다로 행위전반이 아닌 행위하는 입장에서 지칭하며 그래서 출석에 대답하다는 말도 报到 쓴다. 여담으로 출석 대답할때 한국어는 네 일본어로 하이 영어는 here 중국어는 到도착했다고 대답한다.

+출석을 부르다 일본어는 出席を取る 出欠を取る
라고 쓰는데 토루가 한국어로 주로 '잡다'로 해석하지만 숫자세기, 메모하기, 조사 등에 두루 쓰인다. 출석을 조사하여 기록하는 행위이니 토루가 쓰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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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에 불교의 힘으로 극복하기 위해 만듬. 고려의 서울 개경(현 북한 개성)에서 떨어진 현재의 경남에 보존했던 이유는 몽골의 침략으로 한번 대장경이 소실되었고 이에 강화도로 서울을 옮겨 다시 수복에 심기일전하며 고려대장경 제작에 들어갔고 소실되지 않길 바라 강화도에서 최남단 합천 해인사로 옮겨 만들었다.

왜인들은 툭하면 고려대장경을 달라고 때마다 징징거렸는데 대체 왜 그토록 고려대장경을 갖고싶었던걸까?
1 당시 목판인쇄기술의 최정점
글자체가 미려하고(추사 김정희가 목판으로 이게 가능하냐며 감복), 컴퓨터로 해도 오탈자가 많은 현대인인데 8만개 목판속 그많은 한자 깎았으면서 오탈자가 없었음.
2 문화유산적 가치=불교계의 성경=불교 총정리
부처가 제자들한테 가르쳤던 것들을 모아 각 종파마다 경전을 낸게 수천가지임. 불교는 기독교나 이슬람교처럼 하나로된 성경이나 쿠란이 없음. 이걸 총정리한게 고려대장경임.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뿐 아니라, 중국, 거란, 여진, 불교경전까지 총망라했으니 세계적으로도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어마어마함.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되었음은 당연지사.

https://www.yna.co.kr/view/AKR20170424149500797

[숨은 역사 2cm] 세종대왕, 팔만대장경 일본에 공짜로 넘길 뻔했다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천년 고찰 경남 해인사에서 2017년 팔만대장경이 공개됐다.

www.yna.co.kr


팔만대장경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정확한 불교 대장경으로 인정받지만, 그동안 사라질 고비를 무수히 맞았다.

불교를 숭상하던 일본은 조선 건국 직후부터 팔만대장경판에 집착했다.

조선 포로를 돌려보냈다가 대장경 인쇄본 2질을 받은 게 계기가 됐다.
태조는 1395년 조선인 포로 570명이 돌아오자 답례로 인쇄본을 하사한다.

이때부터 일본은 포로 송환 때마다 대장경을 달라고 애걸한다.
대장경이 갖는 불교 가치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태종은 한때 대장경판을 건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인쇄본을 일일이 찍어서 보내는 부담을 덜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조선은 1556년까지 약 50차례 인쇄본을 준비하느라 큰 불편을 겪었다.
그런데도 태종은 머잖아 결심을 바꿔 원판을 계속 보유하기로 한다.
신하들이 일본 기증을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다만 경기도 여주 신륵사 인쇄본은 일본에 건넨다.
1381년 간행된 것으로 총 587상자에 4천995첩이나 된다.
팔만대장경판으로 찍은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현재 일본 교토 오타니 대학 도서관에 있다.
이런 일이 150년 넘게 반복된 탓에 조선에는 대장경 책이 사라진다.

대장경은 일본에서 불교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한다.
대장경을 찍은 책 가운데 국내 최고 작품은 1865년 만든 강원도 월정사 소장본이다.

일본은 희귀 동물과 대장경 원판을 맞바꾸려는 노력도 했다.
1411년 아주 귀한 선물이라며 코끼리 한 마리를 보내 대장경판을 요구했다.
조선은 코끼리를 예의상 받았지만, 애물단지였다.
식량을 닥치는 대로 해치우는 데다 고위 관리를 밟아 죽이기까지 했다.
징벌 차원에서 한때 전남 순천 섬으로 유배 보냈다가 육지로 옮긴다.
태종이 죽이지 말고 잘 키우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다만, 사육비가 워낙 비싸 전라·경상·충청 등 3개 지방이 돌아가며 키운다.

일본은 코끼리 선물 약발이 통하지 않자 단식 투쟁도 벌였다.
세종 6년 대규모 사신단이 토산물을 바치며 대장경판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돌발 행동을 벌였다.
사신 2명이 갑자기 식사를 거부한 것이다.
이들은 "빈손으로 귀국해서 처벌받느니 차라리 여기서 먹지 않고 죽을 수밖에 없다"고 위협했다.
세종은 더는 버티기 힘든 듯 "우리에게 무용지물이니 그냥 내어주자"고 제안한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국보급 문화재가 일본 앙탈에 공짜로 넘어갈 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자 곧바로 없던 일로 한다.
신하들은 고귀한 대장경 가치를 고려해서 제동을 건 것은 아니었다.
대장경판은 아낄 물건이 아니지만 이번에 넘겨주면 나중에 다른 요구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이래놓고 대신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밀교대장경판과 주화엄경판 줌... 와 진짜 뒷목이야

류큐(오키나와) 왕국은 해인사로 무장 군대를 보내 약탈을 시도하기도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장경판 확보에 열을 올린 것이다.
불교를 억압하는 조선을 귀찮게 하면 언젠가는 넘겨줄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세종은 골머리를 앓자 대장경판 보관소를 이전하는 방안을 고려한다.
도성 근방인 회암사 등에 옮기면, 국보급으로 여긴다는 뜻을 일본이 알고 더는 요구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송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실행하지는 못했다.

대장경은 일제 강점기에도 위기를 맞는다.
일제가 강제로 반출하려고 했다.
해인사 승려들은 대장경을 불태워서 같이 타 죽겠다며 거세게 저항했다.
한 승려는 죽어서 대장경이 보관되는 일본 어디든 저주를 내리겠다며 칼로 자해하기도 했다.


ㅡㅡㅡㅡㅡㅡ
일제강점기에도 몸바쳐 문화재를 지킨 해인사 승려들 덕분에 고려대장경을 그대로 지킬 수 있었는데, 이에 일본에서는 고려대장경을 원본으로(달라고 애걸해서 목판인쇄한 판본을 몇차례 받아놔서 일본에 여러개 갖고있음) 하여 다이쇼 신수 대장경(다이쇼 시대 새로 편찬한 대장경이라는 뜻, 1924~1934)을 만든다.

https://ja.m.wikipedia.org/wiki/%E5%A4%A7%E6%AD%A3%E6%96%B0%E8%84%A9%E5%A4%A7%E8%94%B5%E7%B5%8C

大正新脩大蔵経 - Wikipedia

『大正新脩大蔵経』(大正新脩大藏經、たいしょうしんしゅうだいぞうきょう)は、大正13年(1924年)から昭和9年(1934年)までの10年間をかけて、日本の大正一切経刊行会が編纂した大蔵経

ja.m.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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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2022. 6. 21.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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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형

2022. 6. 20.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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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복전쟁은 유목민이 비옥한 땅을 차지하려는 게 강하고(고구려) 등따시고 배부르고 자본을 축적하면 문명이 발전하기 마련이다. 기호학파의 경우, 전라도가 평야가 많고 따라서 풍부한 농업 자원을 가졌으니 자연스럽게 학문탐구와 정계진출에 대한 열망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경상도는 현재 공업단지가 많지만 옛날에는 농경사회였으니 농사를 지었겠지만 산맥이 있어서 전라도 만큼 평야가 많은 인상은 아닌데 뭘로 벌어먹고 살았을까.

조선 전기의 선진 농업 지역, 경상도
14세기 중・후반부터 16세기 중・후반에 이르는 200여 년 동안 경상도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발달한 농업 기술력을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높은 인구 비중, 선진적 문물 및 문화의 보유, 주목할 만한 인재의 배출 등 다방면에서 선진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경상도 수전 농업에 대한 이해는 조선왕조 전체의 농업 발달 수준을 가늠하는 풍향계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이 시기 경상도는 농경지의 상경화 추이, 저수지를 중심으로 한 수리시설의 설비, 수경직파법 및 이앙법 등 농업경제상의 각종 지표에서 가장 선진적인 농업지대였다. 15세기 초반 경상도에서 실험되던 수경직파법이 경기도 남부 지방에 도달한 것은 15세기 후반이었다. 15세기 중・후반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경상도의 이앙법이 충청도에 이른 시기는 17세기 전반, 경기도는 17세기 중반이었다. 경상도는 이러한 눈부신 수전 농업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17세기 초반 수전 중심 농업 지대로 편입되었다. 그런데 농업 경제상에서의 경상도의 독보적 지위는 임진왜란 이후 여타 지역이 빠르게 성장함에 따라 위협받게 되었다.
『조선시대 경상도의 권력중심이동』 p41~42, 태학사, 김성우

역시나 토지지형의 단점을 선진 농업기술로 상쇄시켜 안정적인 농작물생산으로 일찌감치 농업경제의 우위를 차지했다.

4c경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이 소수임에도 그대로 일본의 귀족계층이 될 수 있었던건 수로를 대는등의 선진 농업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우 귀하게 대우받았고 환영을 받았다. 웃어른 말씀에 '기술'배우라는 거 틀린거 하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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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치기

2022. 6. 19.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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