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통을 거스를수 없음
내가 자료화면에서 보기론 80년대도 저랬음. 일본은 한번 전통이나 습관으로 굳어지만 아무 생각없이 따름. 그중 하나가 장례를 불교식으로함. 불교신자가 아닌데도!

2 동조압력
같이하지 않으면 무리에서 탈락되는게 아닐까 하는仲間ハズレ공포가 있음. 그래서 남들이 하는건 나도 해줘야한다는 압박을 느낌. 참고로 ハズレ하즈레를 한자로 쓰면 外れ인데 한자만 봐도 뭔가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밖으로 내쳐지는 뉘양스가 보이는데 ‘꽝’도 하즈레라고함. 기대나 예상이나 통념을 빗나가는 안좋은 상황을 일컫는데 얼마나 압박스러운지 일본인이 의사표현을 제대로 못하게 만드는 의식이 뿌리깊은지 알수있다.

3 칼박자 : 공포정치의 산물

토요토미 히데요시 행차도


조선통신사가 오오사카~쿄토 가는길에 요도강을 건너는데 화려한 통신사를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였으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소리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통신사들은 그들을 마치 ‘담벼락’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조선은 죄의 경중에 따라 곤장~능지처참 등이나 왜는 아묻따 참형(목을베는 형벌)이었다고 한다. 쿄토식화법은 일본 내에서도 돌려말하기로 유명한데 일왕이 살았던 옛수도로서 칼로 무장한 사무라이들이 가차없이 베고다녔다. 무역으로 번성하였던 오오사카인들이 너스레와 익살스런 화법인것과 대조적이다.
사무라이 나라는 군국주의를 거쳐 상명하복의 정서와 칼박자가 생활화되는데 경례만 해도 자유주의국가에선 상상할 수 없이 딱딱하며 가차없다. 단적으로 일제강점기 황국신민서사(일왕충성맹세),궁성요배(일본왕이 있는 방향으로 절하기)에서 따온 박정희 정권시절 국민의례•국기에 대한 맹세•민방위사이렌-요즘엔 아무도 신경쓰지 않지만 80년대 일본에서 찍은 다큐에 남대문 근처에서 갑자기 사이렌 울리자 사람들이 길가다 멈춰서고 국민의례할때처럼 가슴에 손얹는 경례를 하는거 보고 충격-만 봐도 매우 경직된 군문화의 잔재임을 알수있다.

박수만 해도 각자의 박수 속도가 다르고 흥에따라 누군 길게 치고 짧게치고 제각각의 박수운율이 모여 무질서속의 박수 갈채가 만들어지는 것을 모두가 딱딱 한가지 박자에 맞게 박수를 쳐야한다는거 규격을 강요하고 자유없는 군대같은 딱딱함이다.
당연히 한국문화인줄 알았던 337박수는 뜻밖에 kpop한류스타 콘서트장에서 일본인이 앵콜유도할때 쓰는걸 보고 그 때 그 문화충격이란…

역시나
https://mnews.sbs.co.kr/news/endPage.do?newsId=N1000787575

응원할 때 흔히 쓰는 '337박수'…일제 잔재였네

우리가 많이 하는 3-3-7 박수가 일제의 잔재라는 사실 알고 계십니까? 광복 이후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에서 조차 일본 군국주의 문화를 완전히 털어내지 못했습니다.

news.sbs.co.kr


구글링에 치니까 첫결과에 나무위키 내용이 다나와서 어쩔수없이 읽어버렸는데 337박수 일제잔재 부정하며 일본인이 못알아듣는다며 써놓은게 手締め테지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본에선 337拍子박자라고 하니까 못알아듣지 오타쿠 새끼들아ㅋㅌㅋㅋㅌㅋㅋㅋㅋㅋ337박자라고 하는 이유는 박수뿐 아니라 악기로도 다양하게 쓰임. 이래서 나무위키 믿거ㅇㅇ

https://youtu.be/gnv8nyNTIJ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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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남자의 충고.line

생각 2022. 10. 13. 20:48


너무 화나고 분해서 올리고 싶다
이걸 올려서 어쩌라는 건지 나도 모르겠지만
셀털 같지만 이름 같은 게 나온 건 어차피 본명이 아니니까 양해해주라 ...

일본여행 와서 일본인 남친이랑 만나서 노는데 얘가 계속 날 기피하고 내 언행 하나하나에 당황해하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
내가 잘못한 게 있는지 물었는데 만날 땐 또 아니래.
근데 방금 저렇게 라인이 옴

저 부분에 대한 거 팩트를 나열하자면
전차 안에서 화장 고친 적 없고 쿠션 꺼내서 거울 꺼내본 게 전부
목소리 큰 편 아님 웃을 때 크게 웃고 그냥 장난으로 자주 귀여운척 하는 말투를 씀
복장은 한국에서 많이 입는 하이웨스트 검정 핫팬츠, 좀 짧은 원피스를 입었는데,
일본에서 하의 짧은 걸 많이 안 입는다는 건 아는데 내 돈 주고 옷 사입고 놀러가서 세상 눈치까지 봐야 될 이유가 있나

마스크 벗고 밥 처먹으라는 건 뭔 소린지 나도 모르겠다
식사 땐 입 닫고 먹으라는데 밥 같이 먹으면서 대화 안 하는 무리도 있니

나도 어디 가서 절대 무례한 짓 안 해

알바도 많이 해봤고 소심해서 매사에 눈치보고 예의에 민감해
자유분방하고 남한테 피해만 안 주면 된다는 주의일 뿐임
근데 실제론 말도 안 하더니 여행 마지막날 갑자기 저렇게 라인 보내오니 소름끼치고 정떨어진다

저놈 요즘 가난하다길래 나도 없는 돈 쥐어짜서 데이트비용도 내가 다 내고 지 편할대로 일정 바꿔도 꾹 참았는데 저런 걸로 날 지금 엄청 못 배워먹은 미개하고 뻔뻔한 인간 취급하고 있으니 지금 화나서 말문 막히고 손이 떨린다

일본인들 아무때나 여자력 강조하는 거 역겹고 예의에 지나치게 민감한 거 비굴해 보일 뿐인데
저 싸이코스런 고나리질 실제로 겪으니 일본 자체가 혐오스러워짐


++
사귄 지는 5개월 됐는데 장거리다 보니까 실제로 만난 기간은 다 합쳐서 15일 정도이려나... 거의 항상 라인으로 대화하고 나도 낯가림 심해서 초반엔 극조용한 모습만 보이다가 친해지고나서 원래대로 털털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더니 저런 거부반응을 보이네 ㅋ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원글 글쓴이의 말과 톡내용이 완전 상반되는 부분이 있다.

번역기가 잘못 되어서 그런데 원문에는 "더좋은 남자를 일본에서도 남자친구로 만들수 있어"라는 부분에서 남자가 과연 남친인가 싶고, 돈없다고 한거부터가.... 방울뱀당함.

'일본에서도 좋은 남친' 웅앵은 글쓴이는 한국사는데 굳이 일본에 좋은남친 만드는 충고를 할 필요가 낮아서 의아하다.
2주가량 일본여행온 여자인 친구한테 하는 충고라면 더더욱 이상한게 저건 완전히 일본에서/일본인적 문화와 예의라서 잠깐 들른 외국인에게 할 소리가 아니다. 일본내 장거리인가 해서 다시 봐도 '일본여행'이라 쓰여져 있어서 이건 정말 주제넘는다.
특히 "일본인으로서의 예절과 겸손에서 우러나오는 품격을 가진다면 더욱더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이 될거라 생각했어"라는 부분이 뜨내기 친구한테 할소리는 아님.

그런데 또 여친이 맞다면 이해는 간다. 추후 일본에 살거라면. 그럼 앞에 말한 '더 좋은 일본남친'은 그냥 자신을 낮춰 자기보다 좋은남자라는 겸손이거나 일반론으로 말한것으로 보인다. 일남은 겸손, 한남은 근자감


일본에 거주하는 사람이거나 일본에 살 예정이라는 가정하에 저 톡을 본다면, 매우 정중하게 상대를 걱정하고 배려하는 말투로 상대를 위해서 하는 현실적인 조언이다. 옷이랑 화장빼곤 남자한테도 해당된다.

1.노출이 적은옷 : 핫팬츠나 오프숄더 등등 안입는게좋음.
이게뭐? 하는데 서양권에서 가슴만 가리는 크롭탑을 입든 꼭지윤곽이 드러나는 옷을 입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성적으로 보지 않지만 한국에선 난리나는거처럼, 일본에선 별개다 성적대상화하는 나라에다 av의 나라여서 여자들이 성적으로 보일 건덕지를 차단하는 보수적인 패션을 선호함.

일본패션하면 떠오르는 긴치마.
치마속찍는 도촬범 때문에 아예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로 원천차단하기도 한다.

화려한 연예계 그중에서도 시상식 패션만 봐도 노출을 피하고 정장에 가까움.

신인여우상 후보

일반인아니고 연예계에서 튜브탑 드레스 정도도 섹시하다고 난리남🤷

구글링

이정도 노출이 없는 여름원피스도 평소 진지하고 예의있는 일본지인이 섹시하단 소릴함. 얼탱터져서 이유를 물어보니 어깨가 드러나서😲 경악😬

2. 한국어 말할때 같은 목소리랑 말투
외국어에 서투르면 단지 표현을 유창하게 못할 뿐인데 띨하게 봄. 왜냐하면 모국어 못함=저지능인데, 그걸 모국어가 아닌 낮은수준의 이중언어구사자 한테도 같은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오해해서 만만하게봄. 일본 살거면 유창해야함.

3. 上品/下品 기품, 품격, 품위/천박, 경박, 상스러움
일본인의 사고관 전반을 강타하는 기준이다. 일본인은 물론 자본주의니 물질적인 돈도 좇지만 무형적 가치로써는 기품을 가장 추구한다. 그래서 근본적인 품위를 보여주는 예의, 말투 등을 중시한다. 이건 성별과 관계없이 모두에게 해당됨.

4. 전철안에서 화장
공공장소에서 화장을 고치는 것은 사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행동이라 생각한다.

5. 식사 예절 : 한국에서도 가정교육으로 다 배우는 내용. 원글쓴이가 식사하면서 얘기안하는 사람이 어딨냐는데 말하면서 입을 안가리니까 입안에 음식물이 다보여서 비위상해서 그럼. 일본에서는 괜찮지만 서양권에는 후루룩소리 절대 금지니 주의.
-입을 다물고 씹기 : 입벌리고 씹는거는 개가 그렇게 씹는다는 말이 있음
-입안에 내용물이 보이지 않게 하기 : 입에 뭐가 있으면 다 삼킨후 얘기하거나, 정 부득이하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얘기하기
-소리내지 않기, 쩝쩝대지 않기

6 자기물건 정리정돈 : 자기집은 알아서 잘 정돈하리라 믿고 남의집 갈때
-남의집 방문 때 신발 가지런히 벗기. 특히 나가는 방향으로 바꿔두면 추가점수땀.
-외투 및 자기물품 가지런히 접어놓기 또는 걸기



https://insweet.tistory.com/531

한국여자가 일본여자랑 친구사귈때 유의할점

각설하고 한국인 여성은 친해지려는 사회적 제스쳐가 일본에선 흉이 될수 있으니 유의할것. -민낯 공개 -부스스한 머리 -빨래 널린거 -청소 안된집 -정리안된 창고나 다용도실 절대 면전에서는

insweet.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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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75228

"국익 도움될 외국인 유치"…DJ 실패한 '이민청' 한동훈 해낼까

법무부 장관이 인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구체적 계획도 내놨다.

www.joongang.co.kr


법무부는 이민 받는 과정에서 국가 간 상호주의 원칙도 지키려고 한다. 가령 국내에선 선거인명부작성 기준일 현재 영주의 체류자격 취득일 후 3년이 경과하고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외국인등록대장에 올라 있는 18세 이상의 외국인은 지방선거 선거권을 갖지만, 한국인이 중국 등 일부 해외 국가에 이민을 갈 경우 지방선거 선거권을 갖지 못한다고 한다. 이런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정하겠다는 게 법무부의 방침이다.


이민청 신설이라는 희대의 사건에
병주고 약주네
법무부가 입법하면 국회 동의가 있어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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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이중언어 말하기 대회와 달리 한중 콕집어 타다문화 배제함

근데 타이틀이 무려 한글날 기념

세종대왕님이 그러라고 훈민정음 창제하신게 아닌데



주관 서남권글로벌센터는 뭘까.

서울시 산하기관



그래서 서울시 정부포털에도 올라옴
https://global.seoul.go.kr/web/news/news/bordContDetail.do?mode=W&brd_no=2&post_no=E79A6F52D56C0134E053C0A8A02361AA

서울외국인포털

서울외국인포털

global.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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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섬에 태초에 살던 원주민은 민남어를 사용하고 인종도 다른 여러 부족국가였다. 스페인, 네덜란드-청나라(청일전쟁 패배)-일본-중국내전 패배한 장개석이 점령하여 한족이 밀고들어온 현재에 이르게 됐다. 그래서 일본이나 국민당(장개석)이나가 돼버린것. 이 틈을 파고든게 일본의 로비에 힘입은 민진당이다. 친일이며 대만독립을 지지한다. (국민당은 하나의 중국지지) 대만은 중국에 밀려 세계적 입지가 곤궁한 상황이라 일본에 의존하여 일본덕에 대만이 발전했다고 대만 정치인이 앞장서서 말할정도.

일본의 전쟁 승전으로 얻은 첫 식민지인만큼 조선처럼 쇠말뚝을 박고 일본어 강제하는 등 민족말살적인 착취는 하지 않았다고 알고있고, 일본 이전에도 외세지배 이력이 있어 한국만큼 반감이 없는것으로 알고 있다. 대만 언론에서 잘 다루지 않는다.



그런데 중국국제방송 기사에서 대만의 일본식민지  피해를 언급한 기사가 있어 흥미롭다.

동양척식회사를 통해 토지를 수탈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대만인의 토지도 마구잡이로 빼앗았다. 결혼하며 전통 타투를 금지하고 있던걸 강제로 지우면서 얼굴에 손상을 입히기도 했다. 황국신민서사 강요, 일본기업의 착취 등 별반 다를게 없다.

https://news.cgtn.com/news/2021-09-03/Japan-s-cultural-genocide-against-Taiwan-s-indigenous-peoples-13fQIuw6ZsQ/index.html

Japan's colonial legacy in Taiwan part 3: Japan's cultural genocide against Taiwan's indigenous peoples

The DPP officials should demand Tokyo compensate their indigenous people for the land, lives and cultural heritage they lost.

news.cgtn.com


중국매체다운 호통도 잊지 않는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대만 고유의 땅에서 자행된 토착 토지 몰수, 폭력과 학살, 문화적 집단 학살 등의 명백한 악을 맹목적으로 무시합니다.

옹호론자들은 대만에서 일본의 유산을 현대화 세력으로 왜곡하고 칭찬하는 경우가 많으며, 결과적으로 민진당은 중국 본토가 큰 나쁜 늑대가 되는 편향된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이것은 대만독립주의자들이 진정으로 대만이나 원주민의 진정한 이익을 옹호하지 않는다는 전형을 보여줍니다. 민진당은 일본 식민주의의 역사적 범죄와 트라우마를 청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는커녕 사실상 식민주의를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조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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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성에서 청나라에 반대하여 마지막까지 성문을 걸어잠그고 개기다가 10일만에 양주성 안에 모든 지나족을 학살한 양주대학살. 80만명이 죽음. 참고로 남경대학살이 20만명.


만주족의 한족 대학살- 이거이 다문화의 병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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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의 한족 대학살- 이거이 다문화의 병폐다!!
반다문총장
2010. 4. 24. 22:11댓글수0공감수




청나라 때의 대표적 금서로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라는 책이 있다. 청나라 초기 청군이 중국 강남의 양주성을 함락시킨 후
1645년 4월 25일부터 5월 5일까지 열흘간 양주 주민 80만명을 학살했다. 당시 청군은 명나라 잔존 세력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양주에서 큰 피해를 입자 본보기로 양주성민을 모두 도륙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대대적인 학살을 감행했다. 이때 양주 주민
왕수초(王秀超)는 청군에게 가족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청군의 만행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 책이 ‘양주십일기’다.


일부 구절을 인용해보자. “이윽고 해가 저물자 청국 군사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는 아우성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성내 곳곳에서 불이 일어나 화염이 오르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시체는 산더미처럼 쌓이고 이날 나는 형과 형수 그리고 동생과 조카, 넷을 잃었다. 이제는 장형과 나 그리고 아내 세 사람만이 남았다.”


이 책에는 무자비한 도살은 물론 강간, 윤간과 간살(姦殺)에 대한 묘사가 무수히 많이 나온다.


양주대학살이 얼마나 심각한 사건인지 알려면 ‘난징(南京)대학살’과 비교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난징대학살은 지금도 중·일 간
극한 대립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사건으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학살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사건은 1937년 12월 13일부터
다음해 1월까지 40여일간 일본군이 중국 난징에서 약 30만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양주대학살은 불과 열흘이라는 짧은
기간에 약 80만명을 학살했으니 규모와 잔혹성 면에서 난징대학살을 훨씬 능가한다.


양주대학살은 청나라 초기의 대학살극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됐다. 청 초기 청군에 의한 대살상극을 흔히 ‘양주십일,
가정삼도(嘉定三屠)’라고 한다. 가정삼도는 다음과 같다. 1645년 청군이 남경을 점령함으로써 명나라 잔존 세력인 남명(南明)
홍광(弘光) 조정이 멸망했다. 이후 청조의 변발령에 반발해 강남 여러 곳에서 민중봉기가 발생했고 청조는 대대적인 살육을
자행했다. 지금의 상하이(上海)가 속한 가정성은 세 차례에 걸쳐 주민들이 학살을 당했다. 이것을 ‘가정삼도’라고 한다.
양주대학살을 생생하게 묘사한 ‘양주십일기’는 청나라 초기부터 금서 중의 금서로 지정됐다. 이 책은 중국 내에서는 잊혀졌으나
일본으로 흘러들어갔고 청나라 말기인 19세기 말에 일본에서 재발견된다. 당시 멸만흥한(滅滿興漢)을 꿈꾸던 한족(漢族) 지사들이
대거 일본에서 망명 중이거나 신학문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양주십일기’를 발견하고는 울분과 흥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이후 이 책은 다시 중국으로 밀반입돼 청조를 타도하기 위한 한족 지사들의 의식화 교재로 널리 활용됐다.


명말청초의 만주족에 의한 한족 대규모 학살


블로그명 :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명 말청초 대학살의 기록들

[양주십일기],[가정을유기사],[강변기략] 등의
사서에는 청군의 만행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아래에 나는 청조의 관방자료 내지 제
삼자의 서술을 토대로 이러한 만행들에 대한 보다 종합적인 자료들을 모아서 서술했다.


1.청조의 관방학살기록자료

우선, 청조는 자신이 행한 학살에 대한 예고격인 자료를 발표하였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청세조실록] 17권 순치2년 6월 병인중의 기록이다.
“ 이 포고령을 공표한 이후, 북경성 내외와 직속 각성에서의 모든 백성은 10일 안에 변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이를 위반할 시, 어떤 변명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自今布告之后,京城内外,直隶各省,限旬曰尽行剃完。若规避惜发,巧词争辩,决不轻贷”。并宣称:)



이와 동시에,
“변 발령을 지켜서 투항하는 지역은 기존의 지위와 부를 보존하게 될 것이다. 만일 반항하는 지역은 대군을 출동시켜,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고,살륙할 것이다.”
“所过州县地方,有能削发投顺,开城纳款,即与爵禄,世守富贵。如有抗拒不遵,大兵一到,玉石俱焚,尽行屠戮。




청 조는 1649년 사천성에서 또 다른 포고령을 발하였고, 그 어감은 앞서와 유사하다.
“일반 백성과 반란군이 혼재하여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성주민을 죽이거나, 혹은 남자만 죽이고, 여자는 남겼다.”(民贼相混,玉石难分。或屠全城,或屠男而留女)
청 조의 다른 관방자료인 [동화록] 5권 순치원년조에는



“본조의 명령인 변발과 만주복식을 따르지 않는 자는 용서없이 죽인다.” (不随本朝制度剃发易衣冠者,杀无赦)
진강지부의 포고에 의하면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변발을 하지 않으면 전가족을 몰살시킨다. 만일 한 가족이 변발하지 않으면 부락 전체를 몰살시킨다.”



(一 人不剃发全家斩,一家不剃全村斩고 하면서, 반항자의 머리를 잘라, 전체 백성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순 치 2년(홍광원년 1645년), 강년순무 토국옥은 “변발하고, 복장을 바꾸는 것은
새로운 왕조의 제일 중요한 정책이고, 모든 지역에 걸쳐서 실시되어야 한다. 만일 귀족, 군인,일반 백성 등이 자신의 머리를
보존하고자 하면 머리카락을 잘라야 할것이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면 머리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남산은 옮길 수 있으나,
이 명령은 바뀔 수 없다.”
(剃 发、改装是新朝第一严令,通行天下,法在必行者,不论绅士军民人等,留头不留发,留发不留头!南山可移,此令不可动!)




이 상의 청조의 공식적인 자료에서 ‘전성을 도륙한다.’,’도륙을 실시한다.’,’죽이되 용서하지 않는다’,’전가족을 몰살시킨다’(“屠全城”、“尽行屠戮”、“杀无赦”、“全家斩”、“全村斩”) 등의 흉악한 위협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하의 글에서 청조의 위협이 결코 입으로만 끝난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청군 입관 전의 대학살

우 선, 청군 입관 전, 요동지역 한족을 대상으로 한 대량학살의 기록이 초기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명9년 정월 , 누르하치는 9차 명령을 내려서, 소위 ‘무곡지인’이라 하여 곡식의 수확량이 5금두를 넘지 못하는 가난한 한족
인구 를 적으로 삼아 사로 잡아서 관내로 돌려 보내게 하였다. 최후로 정월 27일 명령을 내려, 각지에서 조사된 이 한족인구들을
모 두 살해하도록 했다. 즉, 공개적인 종족학살이었다.
천명10년 10월 3일, 누르하치는 한족을 비판하여 ‘간첩을
숨기 고,굴욕을 겪는 데 익숙하며, 반란이 끓이지 않는다’며 팔기의 각 패륵과 총병관으로 하여금 병사를 대동하여, 촌락에 한족을
만 나면, 말에서 내려 곧장 사살하도록 했다.

제삼자인 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3년 5월조에 요동인구의 참상에 대해 이렇게 써있다.

비록 청이 요양을 획득했지만, 이 지역 주민중 이들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이 변경을 넘어 왔다. 적이 크게 이르자 주민 중에는
변발을 원하지 않는 의로운 자는 거의 압록강에 투신하여 죽었다”(时奴贼既得辽阳,辽东八站军民不乐从胡者,多至江边……
其后,贼大至,义民不肯剃头者,皆投鸭水(鸭绿江)以死)

3. 청조 입관 이후의 대학살

1) 청조관방자료 및 제삼자의 자료

청조는 입관 이후, 자신들의 대학살을 적나라하게 인정하였다. 이것은 순치 7년 2월 청의대산서총독 동양량이 이르길,
“대동, 삭주, 훈원 삼성에서 이미 대학살로 인해 백성이 존재하지 않음”


조의 자료 <명청당안>에 의하면, 순치 7년 11월 21일 모든 성주민을 도륙하여 겨우 5명의 범인만이 남아서 이들을
석방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삭주지>에 따르면, “성을 도륙하여 마주치는 것은 모두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대학살은 중립적인 제삼자의 자료가 있다. 이태리소속 예수회 수도사 마르티니(1614~1661)가 기록한
<달단전기>에 따르면, “대학살은 11월 24일부터 시작하여 12월 5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여,
일률적으로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그들은 다른 말은 결코 하지 않고, 단지 ‘죽여라, 이 반란자들을 모두 죽여라’고만
외쳤다.”(두문개:<청대서인견문록>53페 이지, 중국인민대학출판사, 1885년 6월판)

네덜란드의 사신
요한 니어호프는 <중국달단대한황제조정에 대한 동인도회사 파견원의 보고>에서 “달단의 전군은 입성직후, 모든 성내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모든 병사는 파괴를 시작하고,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부녀, 아동, 노인의 울음소리는 끓이지 않았다.
11월 26일부터 12월 15일까지 각지의 거리에서 들리는 것은, ‘반란자들을 살해하라’는 소리였다. 도처에서 비명소리, 도살,
약탈이었고, 부자들은 목숨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고, 저 무도한 학살자로부터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사도림 저, 이영칭 역
< 남명사>131페이지, 상해고적출판사, 1992년 12월판)

2) 속세로부터 떨어져 있던 출가인이 기록한 대학살의 규모

<광주시종교지>에 따르면 청 순치7년(1650), 청군이 광주를 정벌 죽은 자가 70만명에 이르렀다. 교외의 오룡강에 진수화상이 사람을 고용하여 시체를 수습하여 화장하였다.
주의할 만한 것은 광주의 70만명 사망 기록은 당시 직접 시체를 수습한 스님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기록이고 사료적인 가치가 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다 가치 있는 것은 이 숫자가 지금에 광주시 대불사 홈페이지에도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출가인은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다.
청조의 대학살을 경험한 후, 그는 “모든 현에 촌락이 없고, 촌락에는 집이 없고, 집에는 사람이 없다.사람은 모두 사라졌다.”고
적었다.

관방자료에 의하면,

북경지역“눈을 들어 보면, 논과 밭이 황량하다”(위주원, 통진민고소,
황청조의, 권1),하남성 “온통 황량한 풍경이고, 사람은 극히 적다”(이인룡, 간황의관미력소, 황청조의, 권4),
호광지역”천리를 둘러 보니, 인적이 끓기었다.”(류여모, 간황흥둔소,황조경세문편권34)

청 조 최고위 통치자의 대학살 참여 증거

순치2년 11월 15일, 양주십일대학살의 실행자였던 예친왕 다석은 학살 중 미모가 빼어난 여인 103명을 획득하였다. 이들을 각각의 청조 최고위층에 헌납하였는 데,
순치제에게 10명, 섭정왕 도르곤에게 3명, 부정정친왕 치얼합랑에게 3명, 숙친왕 호격에게 2명, 영랑왕 아제격에게 1명을 바쳤다(<청초내국사원만문당안석편>중 197페이지).

3) 서로 다른 시기 인물들의 기록과 지방지의 기재

곤 산대학살 : “모두 합해 성중 인물들 중 도살당한 사람이 10명 중 4명에 달하고, 침하에 떨어져 죽은 사람이 10명 중 2명, 도망친 자는 10명 중 하나이다.”<곤신양현속수합지>권 51,

살륙이 끝나자, 성문으로 도망쳐서 물에 빠져 죽은 자, 부녀,어린이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곤산 정상에 중 료중이 부녀 천
명과 어린아이들을 숨겼으나, 수색하여 모두 죽이니, 피가 강처럼 흐르고, 폭포처럼 떨어졌다.”<연당견문잡기>

남창대학살 : “부녀는 각 팔기군으로 분배되어 졌고, 밤낮으로 병사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칼에 맞아 죽는 자, 물에 빠져 죽은 자, 자살한 자, 10명 중 7,8명이 되었다.”(서세박<강변기략>

광주대학살 :”광주에서 학살이 일어나 살아 남은 자가 드물었고, 도망친자는 바다에 빠져 죽었다.”(어재전<속명기사본말>

남웅대학살 : “집집마다 제비집이 비워졌고, 시체는 산과 같이 되었다. 죽은 자는 머리가 잘려졌고, 산자는 포로가 되었다. 피는 땅을 덮어, 어미잃은 아이는 젖을 찾았다.”(청군문서 진잔규,<웅주점가가>


정대학살: “시민들 중, 목을 매달아 죽은 자, 우물에 빠져 죽은 자, 강에 빠져 죽은 자, 피범벅이 된 자, 사지가 잘린 자,
수족이 잘리어졌으나 아직 죽지 않은 자, 뼈와 살이 찢겨진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청병은 집 위를 달려서, 통행에 제지를 받지
않았다. 성내의 난민은 거리에 돌을 쌓아 막고자 했으나, 도망칠 수 없었다. 모두 강에 투신하여 죽었고, 강물은 시체로 넘쳐
제대로 흐르지 못했다. 대낮에 길에는 강,간이 스스럼없이 행해졌고, 반항하는 자는 양손을 나무판에 못을 박아 강,간했다. 청병은
마주치는 사람마다 재물을 바치라 했고, 그 획득한 재물을 허리에 둘둘 감아, 만족하면 백성을 석방했다. 다른 병사를 만나면 또
다시 똑같은 일을 당한다. 바치는 재물이 부족하면, 즉시 칼이 휘둘려지고, 재물이 다하면, 곧 죽음을 당한다.”([가정을유기사])


주 대학살: “병사들의 학살로 인해 시체가 십여만에 이르렀다.” 게양현 관음당 해덕화상 등이 시체를 수습해서 서호산에 화장해서,
유 골을 서호남변에 묻었다. 복건성 동안현 학살 당한 자가 5만명에 달했다. 범천사 주지 석무의는 시체를 수습하여 절 동북쪽
1 리밖에 묻었다. ‘무사정’이라는 정자를 지어서 ‘만가지 선이 함께 귀의한다’고 새겼다.

상숙대학살 : “길을
걸 으면 다리 밑 하천을 말랐고, 퇴락한 집에 우물물도 말랐다. 곳곳에 시체만 쌓여 있으니, 오천여 구가 넘었다. 남녀 중 포로가
된 자는 수를 세기도 어렵다. 연못 옆 나무에는 사람 목이 걸려 있는 데, 모두 마을 주민의 몸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주대학살 : 이 일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명한 <양주십일기>이외,
< 양주성수기략>에도 이 일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 고걸의 병사가 양주에 이르렀을 때, 주민들은 호수주변으로
피난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적에게 해를 입었다. 북쪽은 경계가 엄했으니, 성밖주민들은 모두 성안이 의지할 만하다 여겨, 성안으로
몰려 들어 갔다. 들어 가지 못한 자는 그 머리를 조아려 입성을 탄원하여, 애끓는 소리가 대지를 진동시켰다.공은 마침내 문을
열 어 그들을 받아 들였다. 성이 함락당하여, 예왕의 지휘하에 학살이 행해졌고, 7일이 지나서야 마침내 멎었다. 겨우 공의 시체를
수 습했으나, 날씨가 더워서 시체가 변질되어 알아 보기 어려웠다.”([명계남략])


지에서 변발에 반항하는 자는 분산하여 학살이 행해졌다. “가을이 되어 새 명령이 발포되어, 변발하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해졌다.
명령 발표 후 마을에 변발하지 않는 자는 모두 군대로 이끌려 와, 아침에 끌려온 자는 아침에 죽고, 저녁에 끌려온 자는 저녁에
죽었다.” (<진확집>권 30)

유명한 <강음성수기>에는
“모든 성내 주민의
살해가 끝나자 칼로 성문이 봉해 졌다. 성 내에는 어떠한 것도 남지 않았다. 절의 탑에 숨어 있던 승려 등 53명만이 남았다.
성을 지키기 81일, 성내에 죽은 사람은 9만 7천명, 성밖에서 죽은 사람은 7만 5천명에 이르렀다.”

4) 청군의 성폭행([양주십일]과 [강변기략] 중 항시 볼 수 있는 자료는 열거하지 않음)


치 2년 7월 30일, 청군이 사진에 이르러 “보이는 자 마다 금은을 찾아 내어 노략질한 후 칼을 휘둘러 죽였다. 여인은 음행을
위하여 배로 보냈다.”,”주민을 마주쳐 끌고 가서, 숨긴 물건이 발견되면 배를 갈라 죽였다.”(<연당견문잡록>

순치2 년, 청군은 양주대학살을 행한 후, 무석에 이르러, “배안에는 모두 양주로부터 얻은 여인들이었다. 모두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하고, 화장을 했다.”(<명계남략>권4)


치 원년(1644) 4월, 청병이 산서성 주질현에 이르렀을 때, 생원 손문광의 처 비씨가 사로잡혔다. 부인은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내가 금은을 마른 우물에 숨겼으니, 그것을 취하자” 청병이 기뻐하여, 우물주위로 데려가 물속을 살필
때, 부인은 몸을 던져 죽었다. 금도 부인도 잃은 청병이 화가 나 큰 돌을 던져 버리고 가버렸다.(민국
<주질현지>권6)

“청의 흥안총병은 부녀를 강탈하여 수가 100명에 이르렀고, 음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큰 침상을 만들어서 처첩 십여명을 함께 침상에서 차례로 탐했다. 다시 땅에 나무 말뚝을 박아, 첩들 하나 하나씩 음문을
그 뾰족한 말뚝에 박는 놀음을 한후, 시체는 강에 버렸다.”(<평관지> 권12)

청군이 강음에서 대학살을 한 후, 청에 반항한 부녀는 강간한 후 죽였다. 지방지에 의하면 그 수는 101명에 이른다.(도광 <강음현지>권 20 <열녀>

5) 청이 노획한 한족 노예

숭정 11년 동지에서 12년 봄까지 청군이 기부에서 산동에서 획득한 한족 포로가 46만 2천 3백여명에 달한다. 숭정 15년 동지에서 16년 여름까지 청군이 획득한 포로는 36만 9천명에 달한다.(<청태종실록>

청 군은 입관이후 계속해서 백성들을 사로 잡아 포로로 삼았다. 순치 2년 8월 병부에 명하길,'포로들을, 이전 예에 따라 성을 공략하다 부상당한 병사들에게 하사하라'고 했다.
(<청세조실록>


족 노예들은 주인의 학대를 받았을 경우, 대량으로 자살하였다. 강희 초년, “팔기병 집안에서 매년 자살하는 자가 2천명이
넘었다.”([청사고]),이 를 보건대, 청군의 입관이후,몇 십년간 자살한 한족의 수는 10만명을 넘었으리라 본다.

만주
인의 혹독한 학대로 인하여, 대량의 한족 노예는 도망쳤다. “수개월 동안, 수만명의 노예가 도망쳤다.”<청세조실록>,
청의 통치자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1626년 <도인법>을 제정, “도망친 노예를 은닉하면 참수형에 처한다. 그
이 웃의 10집, 100집, 지방관도 처벌을 받을 것이다.” 이로 인해, 청조에 투항한 유명한 배신자인 정남왕 화종명조차, 도망친
한 족 노예를 숨긴 이유로 강제로 자살했다.

4.대학살의 규모에 대해 추정

필자가 명청교체기 인구변천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명대 중국 인구는 최후로 행해진 공식 통계에 의하면, 51,655,459명이고, 조사시기는 명 광종 태창 원년이었다. (명 가종실록 4권)

청조 최초의 전국적인 인구조사는 청 세조 순치제 8년에 실시되었는 데, 이 때 인구수는 10,633,326명이었다. (청 세조실록 61)

청조가 전국을 완전히 통제한 청 성조 강희제 21년 (1682년, 입관후 48년) 전국 인구는 19,432,753명이었다. 이는 명 광종 태창 원년 인구의 단지 36%이다.


상의 인구 숫자는 당연히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당시 인구에 따라 세금을 납부해야 했으므로 많은 인구수가 조사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명대 실제 인구를 대략 1억에서 2억 사이로 추정한다. 비록 청조에서도 이러한 인구은닉현상이 있었지만,
청군의 입관이후, 인구 감소는 최소로 잡아도 5천만이상이다. 48년 동안 새로운 세대들이 계속 태어난 것을 고려하면, 청조 입관
직후 수년 간 인구 감소는 5천만명을 휠씬 상회할 것이다. 즉, 인구감소가 1억을 초과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수천만명이 청군의 입관 후에 학살당했다고 추정해도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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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의 난(永嘉之亂)은 중국 서진 말기에, 회제(懐帝)의 연호였던 영가(永嘉 307년~312년) 때 서진의 수도를 흉노족이 차지한 사건.

산서성을 중심을 다스리고 있던 흉노왕 유연은 팔왕의 난 때, 성도왕 사마영이 유연에게 공물을 주고 도움을 요청하여 사마영에게 군사 원조를 해주고 있었으나 304년 사마영을 공격한 후 좌국성(左國城;현재 산시성 리스현(山西省 離石縣)을 본거지로 삼고, 대선우(大單于)의 지위에 앉았다. 또한 당시 한족들은 유연을 한나라 성씨인 유씨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유연은 흉노족 앞에서는 대선우 한족들 앞에서는 한왕(漢王)으로 칭해 한왕으로 불렸다. (이 나라는 후에 조(趙)로 이름을 바꾼다) 그 후 산시성 남부로 세력을 확장해, 갈족의 석륵과 함께 허베이성과 산둥성도 정복하였고 많은 한족들을 노예로 삼거나 학살하였다.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란 1126년 송나라가 여진족의 금나라에 패하고, 중국 사상 정치적 중심지였던 화북을 잃어버리며, 금 태종에 의해 황제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에 사로잡힌 사건을 말한다. 정강(靖康)은 당시 북송의 연호다. 금 태종은 휘종과 흠종의 황후와 모친들 그리고 후궁들을 금나라 기방으로 강제로 보냈고 한족들은 휘종과 흠종의 부인과 모친들을 기생이 되어 여진족들에게 희롱당하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


토목의 변(土木之變) 또는 토목보의 변(土木堡之變)은 명나라 정통제 14년(1449년)에 발생한 명나라와 몽골 부족을 통일한 되르벤 오이라트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영종은 친정을 하다가 오이라트의 포로로 잡혀 중국 역사상 야전에서 포로로 잡힌 유일한 황제로 기록되었다. 토목보는 현재 장가구 화이라이 현 토목진이다.


경술의 변(庚戌之變)은 명 세종(世宗) 가정(嘉靖) 29년(1550) 6월, 알탄 칸이 이끄는 우익몽골(右翼蒙古)이 명으로 진공한 사건이다. 사건은 세종 가정제(嘉靖帝)가 몽골과의 무역을 거절하면서, 오르도스 일대에 분봉되었던 몽골 투메드부(土默特部) 수령이자 다얀 칸(達延汗)의 자손인 알탄 칸(俺答汗)이 전쟁을 일으켰다. 알탄 칸은 명나라에 말 무역과 와시(교역 시장)을 열어줄 것을 여러 번 명나라에 요구했지만, 가정제는 이를 거절했다. 이 전쟁에서 대동(大同)에서 명나라 수도 북경(北京)까지 곧바로 쳐들어오면서 주변의 것들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이때가 경술년(庚戌年)에 해당하므로 '경술지변(庚戌之變)'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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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TVBS 한국 "김치기"

한국 공군 블랙이글스의 고등훈련기 T-50을 두고 대만방송사 TVBS가 "김치기"라는 단어를 써서 보도했다.
사실 김치의 중국어는 辛奇신치xinqi인데 泡菜파오차이를 썼다.


논란이 되자 유튜브에서 파오차이는 블러처리를 해서 감춘 대만 TVBS방송국.

그러나,

"T-50은 남한친구들에 의해 '김치기'로 부른다"는 거짓말이 버젓이 설명란에 적혀있다.
해쉬태그에 #남한
대만을 국가취급해주는 몇안되는 나란데 그럴필요 전혀없음

한자문화권에서 전부 한국으로 부르는데 대만만 혼자 꾸역꾸역 남한이라고 부르는 대만 TVBS방송국.
매우 음침하고 악의적이다.



어? 뭔가 생각나나

https://insweet.tistory.com/703

대만방송, 태극기에 코로나 바이러스 삽입

남한-북한은 별 생각 없다. 한국-북조선인 일본보단 나으니까. 대체로 한국은 한국으로 불러주는데 저따구지. 중국도 한국은 한국이라 부르는데ㅋㅋㅋ 그러나 지난 동방항공 추락사고에서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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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태극기에 코로나 합성한 거기야


https://insweet.tistory.com/687

동방항공 비행기 추락사고에 아시아나 비행기 쓴 대만방송

요약 1. 동방항공(중국) 비행기 추락사고남 2. 전문가가 설명하면서 아시아나 비행기 모형을 쓴 대만방송 3. 대만 커뮤에서 논란나자 퍼가서 뭐가 문제냐고 적반하장 한국인은 대만에 아무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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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뿌리깊은 반한
https://insweet.tistory.com/867

2008 베이징올림픽 야구 대만전, 한국인은 모르는 대만인의 뿌리깊은 반한

2008 베이징올림픽 야구 최종예선 한국VS대만전 거짓말쟁이 한국 K.O.REA K.O.REA 태극BYE 김치* 한국은 중화 야구 못이긴다 *오래전부터 한국을 김치로 불렀던 대만 한국 정말 잘한다 그러나 니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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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1004001005

여가부 폐지·재외동포청 신설… 尹정부 조직개편 속도전

고위당정, 보건·복지부 분리 검토 민주와 협조 없이는 통과 어려워 택시 부제 해제 등 공급 대폭 확대 국민의힘과 정부가 윤석열 정부 조직 개편에 착수했다. 새 정부 출범 이후로 미뤄 뒀던 정

m.seoul.co.kr


재외동포청은 찬성인데 재외국민인것만 철저히 확인되면(중국에서 문서 위조로 입국하는 조선족 너무 많음) 한국에 정착하게 도와주는 것도 의미있음.

이민청이 문젠데 이걸 다하네....


이미 역차별인 다문화 청약에 외국인 청약 추진하는 오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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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없어서 댓글 못달음
개논리 화교 댓글공작에 말리지 마세요

댓글1)
ㅈㄴ 웃긴건 정작 우리나라에서도 화교 차별했음 이 역사가 그렇게 오래된게 아님 ㅋㅋ 외국인 토지몰수법으로 땅뺏고 그렇게 쫓겨나 어영부영 차린 중식당에서 쌀밥 판매금지까지 때렸었음 이 모든 이유가 별 이유 없이 그냥 자국 이익때문에 저질러진 일이었음 웃기지않음? 심지어 한국에 있었던 화교들 중에는 625 참전해서 우리 편으로 싸웠던 사람들도 꽤많았는데 ㅋㅋ 왜 재일교포랑 비교하면 안된다는건지 이쯤되면 이해가 안감
☞중국은 2022년에도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임
중국은 현재도 중국인이 끼지 않으면 사업체 설립 자체를 할수도 없음
한국도 상호주의로 중국이 하는만큼 해야됨
☞중국인이 올려놓은 집값 주범인데 정작 LTV, DSR 대출규제랑 다주택자에 대한 취득세, 보유세, 양도소득세 중과 안받는 특혜 누려서 부동산 싹쓸이할정도로 자국민 역차별받고 있고 있는데 감히 차별을 논해.
☞북한 위해서 싸웠던 중국인은 물론 북한군에 붙은 화교도 있는데 어디 숟가락 올리려고 또 박쥐질 시동걸지


댓글2)
의치한약수 보장했다는 헛소문 퍼뜨리면서 정작 "화교"만 혜택줬다는 증거 들고오는 애들은 없음 당연함 왜냐? 애초에 화교에게만 주는 혜택같은게 없고 그냥 전반적으로 외국인들에게 허들이 낮았던 것 뿐이니까 ㅋㅋ
☞2022년에서야 폐지된 애초에 "한부모 화교"전형이 바로 화교 전용 특혜가 버젓이 있는데 특혜는 모르쇠가 특기ㅋㅋㅋ
좀만 찾아보면 여기에 대한 명백한 자료들이 다 나와있는데 그걸 찾아볼 노력조차 안하는 거 너무 게으르고...
☞좀만 찾아보면 의치한에 한부모 화교전형 말도 안되는걸 되게해준 명백한 수십년 입시폐단을 입꾹닫하고 노력안하고 꿀빨아 쳐먹은거 숨기고 사실관계 왜곡하기에 도가 튼거 너무 웃겨ㅋㅋㅋ
한부모만 화교인데 대입할땐 화교전형, 그밖에는 다문화 전형으로 대입에 청약에 취직까지 꿀빠는건 특혜가 너무많아서 이건뭐 복지바퀴벌레 잖아

그리고 니가 말하는 화교 때려잡아야 했던 이유 이거 그당시 좆본이 재일교포들 때려잡았던 명분이랑 별차이없는거 알고있지? 그당시 재일교포들 일본 사회랑 동화되지 않았다고 혐오받았고 낮은 소득수준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범죄율 들먹이면서 차별하고 사상은 또 어떰? 북한이랑 어떤 식으로 연계될 지 모른다는 명분으로 얼마나 때려잡았는지 모르지? 진짜 재일들 현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지들 차별에 정당화 할때만 갖다붙이는 거 존나 어이없음 ㅋㅋ
☞재일교포가 대입 특혜받음? 1세대 화교가 불평등조약 특혜받고 들어와서 독점 무역 싹쓸이에 쉽게 땅먹고 조선인들한테 갑질한건 곳곳에 명백한 사실인데 그걸 쏙뺌. 강제징용징병 피해자인 재일교포를 얻다대고 끌어들여. 제물포가 왜 차이나타운인줄 알지? 치외법권이라서 범죄자도 범죄자 처벌 안받았던 특혜받은 범죄자들이 개꿀 빨아놓고 가증스럽게 피해자 코스프레야. 역겹고 추하기 짝이없는 화퀴. 그래서 지금도 화교라고 알려지면 집에 살해협박 당하고 화교 나가라는 단체있고 시위함? 재일교포는 여전히 당하는데 어딜비벼

댓글3)
나랑 의견 반대되면 중국인이고 짱깨래 ㅋㅋ 대가리 좀 제대로 굴려봐 만약 내가 화교라 해도 최소한 대만국적이지 중국국적이진 않을텐데 나보고 덮어놓고 중국인이라고 매도하면서 시진핑 타령하는 건 그냥...... 대만과 중국을 구분하지 않겠다는 태도잖아..... 어 이거 하나의 중국?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가리 못굴리는 전형적인 화교 셈법에만 뇌절해놓고 한국인일리가. 대만과 중국을 한국인이 왜 구분해야함?ㅋㅋㅋ 중국 생기기 이전의 화교 주장하는거면 더더욱 한나라일텐데 왜화내는 것?ㅋㅋㅋ 역시 중국인 탈부착 박쥐근성

우선 우리나라가 화교 학살 안했다기엔 1931년 평양에서 있었던 화교학살 사건 뿐만 아니라 여러 배척사건들이 당시 전국에서 일어났었는데.. 아예 모르고 있던건 이해함 그냥 공부를 안했던 것 뿐이겠지 ㅇㅇ
☞화교 아니면 알필요없지. 화퀴들은 중국인의 외국인 강력범죄 사건 다알아?
의화단 사건은 착한학살이야??의화단 사건은 착한학살이야??의화단 사건은 착한학살이야??의화단 사건은 착한학살이야?? ㅋㅋㅋㅋㅋ 나무위키비롯 2020년대부터 학살프레임으로 조직적으로 생성했더만... 중국은 청말기 1세대 외국인한테 어떤 특혜줬어?
미국에서도 100년전에 중국인 학살 있었대 왜 가만있어?ㅋㅋㅋㅋ 2022년에도 코로나 퍼뜨린 중국인 살해 폭행하는데 화교대입특혜랑 참정권 달라해봐ㅋㅋㅋ미국에서 학살당했으니 원주민 비유 들면서 같은 취급 해달라해봐?


그리고 재일교포에 관해서라면 그렇게 일본에서 핍박받는 재일보다도 외국인참정권 외에 더 사회적으로 권한이 없는게 화교임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도 참정권은 다 안주는데 그 큰걸 왜뺌?ㅋㅋㅋㅋㅋ 화퀴들 세계최고수준임에도 분수를 모르고 바라고 또바라쥬ㅋㅋㅋㅋㅋ재일교포는 대입특혜는 아예 없고, 국립대 입학 못하게 해서 1998년에 첫입학했는데 화퀴벌레야 감히 어디 재일교포를 비벼
예를 하나 간단하게 들어보자면 재일교포들은 최소한 일본 사법시험에 응시 후 연수원 입소 및 변호사 가능함 그런데 화교는? 못함 ㅋㅋ 우리나라가 화교에 주는 진짜 혜택은 다른 외국인들보다 귀화를 엄청 쉽게 해준다는거임 물론 그것도 재일들이 국적포기 하는 것만큼의 난이도라고 보면 됨
☞일본에 재일교포 대입특혜가 있는가? ㄴㄴ
☞일본에 재일교포 참정권이 있는가? ㄴㄴ
☞일본에 재일교포 공무원 가능한가? ㄴㄴ
의사 한의사 대입 외국인전형 특혜 폐지부터 하자고해 그건 절대 안하지ㅋㅋㅋ
우리나라가 화교에게 주는 진짜혜택은 전세계 어디에도없는 대입특혜와 참정권만으로도 넘사벽인데 그걸 빼네 양심뒤진 화퀴


마지막으로 화교가 한국에 마약 범죄 장기문제라는 범죄를 다 끌고온다는 레퍼런스를 가져와보라니까. 너 지금 본문도 안읽고 현대 중국인과 100년전 한국으로 건너온 화교들을 구분 못하고 있는 거 같은데. 아무리 출신지가 대륙이라도 지금 그 땅에 세워진 공산당 정권과는 아무런 연이 없고 그 밑에서 세뇌당한 현대 중국인들과는 정서적 유대감이라는게 굉장히 간극있는 상황인데 너 엄연한 대만국적이고 국민당 지지했던 사람들의 후손인 화교들과 중국에서 건너온 범죄자들을 구분없이 하나로 여기고 있는거임? 너 진짜 솔직히 말해 너야말로 중국국적 아냐...?
☞엥 1세대 화교는 중국과 수교를 맺지 않아서 대만과 수교하면서 자동으로 대만국적이 된것일 뿐 찐대만인조차 전부 국민당원이 아닌데ㅋㅋㅋㅋㅋ 산동성출신화교야 대만화교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던? 개족보 개혼종ㅋㅋㅋㅋㅋㅋ 근데 애초에 국민당은 하나의 중국 지지인데 화퀴야?ㅋㅋㅋㅋㅋㅋ 왜 중국인이라는 범주를 스스로 벗어나는거지? 외국인 사이에 또 같은 중국인 사이에 급간을 만드는 모순봐ㅋㅋㅋㅋ 외국인중에 특별대우, 화교안의 차별을 화교가 해내네. 왜 다르게 여겨야되냐고? 왜 차별운운하면서 다른외국인 차별시켜? 화교 머리속엔 온통 특혜받을 생각으로 꽉찬 버러지 밖에 없는거야. 아니 근데 니가 1세대 취급을 받으려고 해ㅋㅋㅋㅋ지나족아 지나족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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