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에 불교의 힘으로 극복하기 위해 만듬. 고려의 서울 개경(현 북한 개성)에서 떨어진 현재의 경남에 보존했던 이유는 몽골의 침략으로 한번 대장경이 소실되었고 이에 강화도로 서울을 옮겨 다시 수복에 심기일전하며 고려대장경 제작에 들어갔고 소실되지 않길 바라 강화도에서 최남단 합천 해인사로 옮겨 만들었다.

왜인들은 툭하면 고려대장경을 달라고 때마다 징징거렸는데 대체 왜 그토록 고려대장경을 갖고싶었던걸까?
1 당시 목판인쇄기술의 최정점
글자체가 미려하고(추사 김정희가 목판으로 이게 가능하냐며 감복), 컴퓨터로 해도 오탈자가 많은 현대인인데 8만개 목판속 그많은 한자 깎았으면서 오탈자가 없었음.
2 문화유산적 가치=불교계의 성경=불교 총정리
부처가 제자들한테 가르쳤던 것들을 모아 각 종파마다 경전을 낸게 수천가지임. 불교는 기독교나 이슬람교처럼 하나로된 성경이나 쿠란이 없음. 이걸 총정리한게 고려대장경임.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뿐 아니라, 중국, 거란, 여진, 불교경전까지 총망라했으니 세계적으로도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어마어마함.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되었음은 당연지사.

https://www.yna.co.kr/view/AKR20170424149500797

[숨은 역사 2cm] 세종대왕, 팔만대장경 일본에 공짜로 넘길 뻔했다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천년 고찰 경남 해인사에서 2017년 팔만대장경이 공개됐다.

www.yna.co.kr


팔만대장경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정확한 불교 대장경으로 인정받지만, 그동안 사라질 고비를 무수히 맞았다.

불교를 숭상하던 일본은 조선 건국 직후부터 팔만대장경판에 집착했다.

조선 포로를 돌려보냈다가 대장경 인쇄본 2질을 받은 게 계기가 됐다.
태조는 1395년 조선인 포로 570명이 돌아오자 답례로 인쇄본을 하사한다.

이때부터 일본은 포로 송환 때마다 대장경을 달라고 애걸한다.
대장경이 갖는 불교 가치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태종은 한때 대장경판을 건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인쇄본을 일일이 찍어서 보내는 부담을 덜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조선은 1556년까지 약 50차례 인쇄본을 준비하느라 큰 불편을 겪었다.
그런데도 태종은 머잖아 결심을 바꿔 원판을 계속 보유하기로 한다.
신하들이 일본 기증을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다만 경기도 여주 신륵사 인쇄본은 일본에 건넨다.
1381년 간행된 것으로 총 587상자에 4천995첩이나 된다.
팔만대장경판으로 찍은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현재 일본 교토 오타니 대학 도서관에 있다.
이런 일이 150년 넘게 반복된 탓에 조선에는 대장경 책이 사라진다.

대장경은 일본에서 불교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한다.
대장경을 찍은 책 가운데 국내 최고 작품은 1865년 만든 강원도 월정사 소장본이다.

일본은 희귀 동물과 대장경 원판을 맞바꾸려는 노력도 했다.
1411년 아주 귀한 선물이라며 코끼리 한 마리를 보내 대장경판을 요구했다.
조선은 코끼리를 예의상 받았지만, 애물단지였다.
식량을 닥치는 대로 해치우는 데다 고위 관리를 밟아 죽이기까지 했다.
징벌 차원에서 한때 전남 순천 섬으로 유배 보냈다가 육지로 옮긴다.
태종이 죽이지 말고 잘 키우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다만, 사육비가 워낙 비싸 전라·경상·충청 등 3개 지방이 돌아가며 키운다.

일본은 코끼리 선물 약발이 통하지 않자 단식 투쟁도 벌였다.
세종 6년 대규모 사신단이 토산물을 바치며 대장경판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돌발 행동을 벌였다.
사신 2명이 갑자기 식사를 거부한 것이다.
이들은 "빈손으로 귀국해서 처벌받느니 차라리 여기서 먹지 않고 죽을 수밖에 없다"고 위협했다.
세종은 더는 버티기 힘든 듯 "우리에게 무용지물이니 그냥 내어주자"고 제안한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국보급 문화재가 일본 앙탈에 공짜로 넘어갈 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자 곧바로 없던 일로 한다.
신하들은 고귀한 대장경 가치를 고려해서 제동을 건 것은 아니었다.
대장경판은 아낄 물건이 아니지만 이번에 넘겨주면 나중에 다른 요구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이래놓고 대신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밀교대장경판과 주화엄경판 줌... 와 진짜 뒷목이야

류큐(오키나와) 왕국은 해인사로 무장 군대를 보내 약탈을 시도하기도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장경판 확보에 열을 올린 것이다.
불교를 억압하는 조선을 귀찮게 하면 언젠가는 넘겨줄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세종은 골머리를 앓자 대장경판 보관소를 이전하는 방안을 고려한다.
도성 근방인 회암사 등에 옮기면, 국보급으로 여긴다는 뜻을 일본이 알고 더는 요구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송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실행하지는 못했다.

대장경은 일제 강점기에도 위기를 맞는다.
일제가 강제로 반출하려고 했다.
해인사 승려들은 대장경을 불태워서 같이 타 죽겠다며 거세게 저항했다.
한 승려는 죽어서 대장경이 보관되는 일본 어디든 저주를 내리겠다며 칼로 자해하기도 했다.


ㅡㅡㅡㅡㅡㅡ
일제강점기에도 몸바쳐 문화재를 지킨 해인사 승려들 덕분에 고려대장경을 그대로 지킬 수 있었는데, 이에 일본에서는 고려대장경을 원본으로(달라고 애걸해서 목판인쇄한 판본을 몇차례 받아놔서 일본에 여러개 갖고있음) 하여 다이쇼 신수 대장경(다이쇼 시대 새로 편찬한 대장경이라는 뜻, 1924~1934)을 만든다.

https://ja.m.wikipedia.org/wiki/%E5%A4%A7%E6%AD%A3%E6%96%B0%E8%84%A9%E5%A4%A7%E8%94%B5%E7%B5%8C

大正新脩大蔵経 - Wikipedia

『大正新脩大蔵経』(大正新脩大藏經、たいしょうしんしゅうだいぞうきょう)は、大正13年(1924年)から昭和9年(1934年)までの10年間をかけて、日本の大正一切経刊行会が編纂した大蔵経

ja.m.wikipedia.org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