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2901831?sid=103

한반도 다문화 문제의 원조이자, 중국을 이해하는 통로 ‘화교’ [책과 삶]

ㆍ한반도 화교사 - 이정희 지음 | 동아시아 760쪽 | 2만8000원 ㆍ화교가 없는 나라 - 이정희 지음 | 동아시아240쪽 | 1만5000원 1882년 임오군란 후 본격 이주 식칼·가위·면도칼로 ‘삼도업’ 중국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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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책광고
화교들의 징징글로 점철돼있다.


저자는 두발과 의복이 ‘근대화’ 과정에서 담당하는 상징적 의미를 고려할 때, 관련 업종에서 화교들의 경제활동의 범위와 역할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1897년 8월17일자 ‘독립신문’에는 고급 양복을 저렴하게 맞출 수 있다는 내용의 광고가 실렸다. 광고를 낸 양복점은 화교 소유의 ‘원태양복점’으로, 개화파 조선인 지식층 고객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주단포목상점의 대다수는 중국 상업자본의 투자를 바탕으로 설립됐는데, 1930년 기준 조선 전체 상점의 약 20%, 전체 판매액의 30%를 차지했다. 당시 ‘비단이 장사 왕서방’으로 시작하는 유행가가 나올 만큼 화교 주단포목상들이 성황을 이뤘다.

☞마치 화교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를 한것처럼 호도하는데, 화교의 시발점은 [조청상민무역수륙장정]이라는 불평등조약으로 조선의 이익을 침탈해갔고 그 이익을 고스란히 누린 집단이 화교 1세대다.
조청상민무역수륙장정을 요약하면,
1. 화교의 상업 보장 : 청나라에 독점 무역 특혜
2. 화교의 어업 보장 : 황해도와 평해도 연안 어업권, 배가 정박하고 조난시 도와줄것. 조선바다의 바다 먹거리를 중국배가 싹쓸이
3. 화교의 치외법권 : 즉 화교가 살인해도 조선 재판소가 아닌 청나라 재판소에서 재판함. 내정간섭 조항이며, 조선인과 분쟁이 나면 화교에게 유리함은 당연.
4. 조선 홍삼 수출 : 홍삼은 조선이 팔고 돈은 화교가 범


그런데 1968년 외국인토지법 개정으로 화교의 부동산 소유를 제한하면서 압박을 받게 된다.
☞해당 내용은 2000년대 이미 내용 개정됨
☞중국은 외국인의 토지 소유가 가능한가? 아님
반드시 상호주의 해야함

한국에서 부동산 투기하는 화교




화교들의 삶의 반경을 제약하는 또 하나의, 아니 가장 큰 요인은 한국 사회의 차별적 법과 제도다. 한국의 화교들은 스스로를 ‘나라 없는 난민’이라고 부른다. 화교들에게 3년마다 거주 자격신고를 하도록 한 출입국 규정은 2002년 영주권 부여로 개선됐다.
☞중국은 단순히 오래살았다고 대를이어 특별영주권 주는가? 아님
중국영주권은 박사급 고급인재, 기술인재, 국가공헌자, 투자자만 가능
https://korean.beijing.gov.cn/livinginbeijing/permanentresidence/

중국 영주권을 신청하는 외국인

베이징시 공안국 출입국관리사무소, 베이징시 공안국 출입국관리사무소 중관춘외국인서비스홀,차오양과 순이 공안국 분국 외국인 출입국 서비스홀, 퉁저우 공안국 분국 외국인 출입국 서비스

korean.beijing.gov.cn




하지만 여전히 공립학교·지자체 공무원 임용이나 변호사시험 응시 자격이 없고, 노화교들은 아동수당 등 복지혜택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화교에 대한 처우가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갖는 법적 지위보다도 열악한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중국은 공립학교·지자체 공무원 임용, 변호사 응시자격을 외국인에 기회주는가? 아님
☞중국이 외국인에 아동수당 등 복지혜택을 주는가? 아님
☞재일조선인처럼 조선에 강제징용 강제징병당한 역사가 있는가? 아님
☞중국이 국내거주 외국인에게 선거할 권리를 부여하는가? 아님 즉각 상호주의해라
☞중국이 국내거주 외국인에게 대학입시에서 외국인전형  기회를 주는가? 아님 즉각 상호주의해라
https://insweet.tistory.com/902

외국인전형으로 명문대 꿀빨며 입학한 화교, 졸업도 꿀빤다

전세계 유일하게 외국에서 살아본적도 없는, 자국에서 공부한 외국인을 '순수외국인'으로 외국인 전형을 적용하는 외국인 역차별 특혜입시는 화교의 엘리트화를 대대손손 누리는 수단으로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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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외국인 차별이 명시적으로 있는 나라다. 기차 표끊을 때도 박물관, 유적지를 갈때도 매표소 창구, 예매가능한 시간, 외국인 요금을 더 비싸게 차별하는게 일상이다. 중국체류시 호구부 주숙등기 하는 어마어마한 불편함은 물론이다.


1927년과 1931년 일어난 ‘화교배척사건’을 다루는 장은 특히 뼈아쁘다.

1. 항일독립단체 국민부의 노력

1931년 일본이 만주침략의 야욕을 실현하려는 수단으로 이른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을 일으켜 한·중 두 민족을 이간시키고 있었다. 이 때 국민부는 이 사건이 일본의 간악한 음모에서 비롯된 것임을 천명해 사태를 수습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만주사변 뒤 일본이 만주 전역을 강점하자, 일부 지도급 인사들이 변절해 국민부를 이탈하였다. 또 사회주의자들이 내분을 일으킴으로써 혼란에 빠졌으나 곧 사태를 수습, 전열을 정비하였다.

1932년 조선혁명군과의 연석회의를 통해 한·중연합작전을 수립하고, 중국의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인 중국의용군과 연합해 영릉가전투(永陵街戰鬪)·흥경성전투(興京城戰鬪)·노구대전투(老溝臺戰鬪)에서 대승하였다.

(중략)

국민부의 사업 가운데 농민 운동은 중국 관청의 부당한 행정처분과 여러 가지 제한 조처, 그리고 중국인 지주들의 횡포와 착취로부터 농민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한국인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일본의 모략을 저지해 한국과 중국간의 유대를 강화시키는 일이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6303

국민부(國民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2. 1920년대부터 국가차원에서 재만조선인 탄압했던 중국

3. 만주조선인 8000명 학살했던 중국인

"중국인 무장 집단은 마을을 샅샅이 훑으며 식량·돈·옷가지 등을 빼앗거나 반항하는 사람들을 무차별 폭행·살해했고, 부녀자들을 겁탈했다. …조선인 부녀자들은 겁탈을 피하기 위해 얼굴에 숯 검댕이 칠을 하거나, 가족 전체가 밭에 숨어 모기에 뜯기면서 밤을 보내기도 했다."(만주 이민 조선인들의 증언)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약 3년 동안 만주(滿洲) 지역에서 중국인에 의해 조선인 사상자가 8000명 발생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학살의 원인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이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는 정책을 편 데 있었다.

윤휘탁 한경대 교수는 '한교사무(韓僑事務)' '동북복원계획강요초안' '중국조선족 이민실록' 등 중국 측 자료를 분석한 결과, 당시 만주의 조선인이 주로 국민당 측 중국인들로부터 큰 핍박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12일 밝혔다. 1945년 종전 직후 국민당 군대가 점령한 지역에서 조선인 176명이 사망했고 1866명이 부상당했으며, 3468명이 구금, 320명이 강간을 당했다는 것이다. 1947년에는 조선인 2042명이 맞아 죽거나 부상당했고 8468명이 체포됐다.

(중략)

전쟁이 끝나자 중국 국민당군과 지방군·비적 등 무장 세력은 조선인 마을을 자주 습격했다. 셰원둥(謝文東)이란 자가 이끄는 무장 집단이 한 조선인 마을 사람을 모두 살해한 경우도 있었다. 1946년 5월 북만주에서 일어난 '둥안(東安)·미산(密山) 사건'에서는 조선인 100여명이 국민당 정규군에게 살해당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3/12/2013031202656.html

광복 후 조선인 8000명이 짓밟혔다, 중국인에게

광복 후 조선인 8000명이 짓밟혔다, 중국인에게 윤휘탁 교수, 중국 자료 분석 만주 학살 연구 결과 내놔 日의 앞잡이로 몰린 조선인 중국인들이 무차별 폭행, 집계된 사상자 수 더 많을수도 광복

www.chosun.com


4. 한국여자 팔아먹은 일제강점기 화교

이규태 씨의 ‘한국여성의 의식구조’란 책에 보면 근세에 들어서서도 우리나라가 중국인의 횡포에 시달렸음을 볼 수 있다. 당시 우리 여인들을 유인해 팔아넘기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1920~30년대 신문에는 중국인이 한국소녀를 유인한 사건들이 ‘사흘에 한 번 꼴’로 기사화 됐다.

1928년 12월 20일자 조선일보에는 12살 먹은 이금순이라는 소녀가 중국인에게 유괴돼 여러번 두들겨 맞았다는 기사가 게재됐다. 소녀를 유괴한 중국인들은 집단으로 해외 인육시장에 팔아넘기거나 성노리개로 가지고 놀았다. 다른 기사에는 곡마단에 팔려간 딸을 찾았다는 기사도 실려 있었다. 예쁘장한 소녀들은 곡마단의 곡예사로 팔아 넘겼던 것이다.

https://www.sisaweekly.com/news/articleView.html?idxno=35951

왕서방의 횡포 - 시사주간

[시사주간=주장환 논설위원] 1950~60년 대만 해도 ‘왕서방’이란 말이 많이 쓰였다.“비단장사 왕서방 명월이한테 반해서, 비단 팔아 모아 온 돈 툴툴 털어 다 섰소, 띵옹왕~ 띵옹왕~ 돈이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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